아비뇽 교황청과 서방 교회의 대분열: 1378년 두 교황이 등장한 이유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1378년부터 1417년까지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존재하면서 발생한 교회의 장기 분열이다. 신자와 성직자들은 어느 교황이 정당한 계승자인지를 두고 서로 다른 편에 섰고, 유럽의 왕국들도 정치적 이해에 따라 지지하는 교황을 달리하였다.

이 사건은 1054년의 동서 교회 분열과 같은 사건이 아니다. 동서 교회 분열이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의 관계가 갈라진 사건이었다면,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서방 교회 내부에서 교황 선출의 정당성과 교회 통치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위기였다.

아비뇽 교황청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3세기 말부터 교황권은 프랑스 왕권과 로마 귀족 세력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의 충돌은 교황권의 정치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보니파티우스 8세가 1303년 아나니에서 프랑스 측의 공격을 받은 뒤 사망하자, 교황권은 로마에서 안정적으로 권위를 행사하기 어려워졌다.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아비뇽은 당시 교황령에 속한 로마가 아니라 교황청이 행정과 외교를 수행하기에 안전한 장소였다. 이후 약 70년 동안 교황청은 아비뇽에 머물렀으며, 이 시기의 교황 7명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아비뇽 체류는 교황청 행정과 재정 제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교황청은 유럽 각지의 성직 임명과 세금, 재판을 관리하며 이전보다 정교한 중앙 행정 조직을 갖추었다. 반면 로마에서는 교황의 부재가 도시의 쇠퇴와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켰고, 아비뇽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다는 의심도 커졌다.

교황청은 왜 로마로 돌아갔는가

이탈리아의 성녀로 알려진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에게 로마로 돌아갈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로마의 추기경과 도시 세력도 교황청의 복귀를 요구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 로마로 돌아왔지만, 교황청의 행정 기반과 프랑스계 추기경들의 정치적 네트워크는 이미 아비뇽에 깊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11세가 1378년 사망하자 추기경들은 로마에서 새 교황을 선출해야 했다.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인이 아닌 교황을 선출하라고 압박했고, 군중의 위협 속에서 이탈리아 출신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가 교황 우르바누스 6세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일부 추기경들은 선거가 로마 군중의 강압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우르바누스 6세의 거친 통치 방식에도 반발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프랑스 출신 로베르 드 제네바를 새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고 아비뇽으로 보냈다. 이때부터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각각 자신이 유일한 정통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두 교황은 어떻게 유럽을 나누었는가

유럽의 군주들은 교회적 판단만으로 어느 교황을 선택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카스티야, 아라곤, 스코틀랜드 등은 아비뇽 계열을 지지하였다.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 이탈리아 일부 세력은 로마 계열을 지지하였다. 백년전쟁으로 대립하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정치 관계도 교황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각 교황은 추기경을 임명하고 성직자를 서품하며 교회 재판과 재정을 운영하였다. 같은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에 서로 다른 후보가 임명되기도 했다. 신자들이 일상에서 두 교황을 직접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와 교구의 공식 입장은 정치적 동맹에 따라 달라졌다.

역사적 구별
아비뇽 교황청 자체가 곧바로 비정통 교황청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와 아비뇽 어느 쪽이 합법적인 계승자인지를 두고 실제로 논쟁하였으며,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는 로마 계열을 정통 교황 계보로 인정한다.

피사 공의회는 왜 분열을 끝내지 못했는가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추기경들은 1409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공의회는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세를 폐위한 뒤 알렉산데르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두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사 공의회는 두 교황을 제거하지 못하고 세 명의 교황이 경쟁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실패는 교황을 폐위하고 새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공의회의 권한이 무엇인지, 교회의 최고 권위가 교황에게 있는지 공의회에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와 대분열의 종식

신성 로마 제국의 지지를 받은 지기스문트는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렸으며, 교황 문제뿐 아니라 얀 후스의 개혁 주장과 교회의 개혁 문제도 함께 다루었다.

피사 계열의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떠났다가 체포되어 폐위되었다. 로마 계열의 그레고리우스 12세는 공의회의 정당성을 인정한 뒤 자진 사임하였다. 아비뇽 계열의 베네딕투스 13세는 사임을 거부하였고, 공의회는 그를 폐위하였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이베리아반도의 페니스콜라에서 별도의 교황청을 유지하였다.

공의회는 1417년 오도네 콜론나를 교황 마르티누스 5세로 선출하였다. 이 선출로 서방 교회는 하나의 교황 아래 다시 통합되었다.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1418년까지 교회 제도와 교황권의 질서를 재정비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대분열이 남긴 교회사적 의미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교황권이 중세 유럽에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지만, 동시에 선출 절차와 정치적 지지에 의존하는 제도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교황이 여러 명 존재하자 성직 임명과 교회 재정, 신자들의 충성이 모두 불안정해졌다.

이 위기는 공의회주의라는 사상을 확산시켰다.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황 한 사람보다 보편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위기 상황에서 더 높은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실제로 대분열을 끝냈지만, 이후 교황권은 공의회의 상시적 우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 이후 로마 교황청은 통합을 회복했으나, 대분열 동안 드러난 재정 문제와 성직자의 도덕적 타락, 교회 행정의 비효율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15세기 교회 개혁 요구는 훗날 공의회 운동과 종교개혁기의 비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아비뇽 교황청과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한 차례 혼란이 아니라, 교황권과 교회 개혁의 관계를 다시 묻게 한 장기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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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1. Joëlle Rollo-Koster, The Great Western Schism 1378–1417: Performing Legitimacy, Performing Unity.
  2. Norman P. Tanner, The Church in the Lat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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