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성상 파괴 논쟁은 왜 일어났는가: 황제와 교회가 성화를 둘러싸고 충돌한 8~9세기

비잔티움 성상 파괴 논쟁은 성화와 십자가 같은 종교 이미지를 교회와 예배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장기간의 충돌이다. 8세기 초부터 9세기 중반까지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직자, 수도원, 군대와 도시 대중이 이 문제에 얽혔다.

논쟁의 핵심은 그림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있지 않았다. 보이는 형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성인을 표현할 수 있는지, 그 형상 앞에서 드리는 공경이 우상숭배와 다른지, 황제가 교회의 예배와 교리를 어느 정도까지 결정할 수 있는지가 함께 문제 되었다.

성화는 왜 비잔티움 교회에서 중요한가

성화는 비잔티움 교회에서 성경 이야기와 성인의 모습을 전달하는 시각적 매체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의 사건을 설명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성화는 교회 장식물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신자들은 그 앞에서 기도하고 촛불을 켜며 성인에게 도움을 구했고, 성화를 행렬과 전쟁터에 사용하기도 했다.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들은 나무판이나 물감 자체를 하나님이나 성인으로 보지 않았다. 형상에 드리는 공경은 그 형상이 가리키는 인물에게 향한다고 설명하였다. 반대편에서는 실제 예배 현장에서 이런 구별이 흐려질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물질적 형상으로 제한하는 결과가 생긴다고 비판하였다.

레오 3세 시대에 시작된 정책

성상 파괴 정책은 이사우리아 왕조의 황제 레오 3세 시대에 국가 정책으로 등장하였다. 시작 시점과 황제의 정확한 동기는 사료마다 다르게 제시된다. 726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의 성상에 조치를 취했다는 전승이 있지만, 초기 사건의 세부 내용은 후대의 성상 공경 옹호자들이 남긴 기록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

레오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성상에 반대한 배경에는 신학적 판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는 제국의 군사적 위기와 자연재해를 하나님이 내린 징계로 해석하는 분위기 속에서 종교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일부 학자는 이슬람과 유대교의 형상 비판, 군사적 현실, 황제권 강화, 교회 재산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의 원인으로 논쟁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콘스탄티노스 5세와 754년 히에레이아 공의회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버지보다 더 체계적으로 성상 반대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성상 문제를 신학적 논쟁으로 정리하려 하였고, 7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의 히에레이아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상당수의 주교가 참여했지만, 로마 교황과 동방의 주요 총대주교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에는 보편 공의회로 인정되지 않았다.

히에레이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성화로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은 성찬 안에 있으며, 화가가 만든 그림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는 논리였다. 회의는 성인과 성모 마리아의 성화도 배척하고, 성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규정하였다.

이 정책은 수도원을 특히 강하게 압박하였다. 수도원은 성화의 제작과 보존, 성인의 유물과 축일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황제의 관리들은 성화를 파괴하거나 회칠하였고, 일부 수도원 재산을 압수하거나 수도사에게 결혼과 군 복무를 강요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수도원과 모든 성직자가 한 목소리로 저항한 것은 아니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반응은 달랐다.

요한네스 다마스케노스의 성화 옹호

성상 공경을 옹호한 대표적 인물은 요한네스 다마스케노스이다. 그는 다마스쿠스의 기독교 가문 출신으로, 이슬람 지배 아래 있던 시리아에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예루살렘 인근 마르 사바 수도원과 연결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잔티움 황제의 직접 통치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성상 옹호 글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은 본래 보이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취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물질 자체가 악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모습은 표현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가 말한 성화 공경은 창조주에게만 드리는 예배와 구별되었다. 성화에 드리는 존경은 형상을 통해 그 원형인 그리스도와 성인에게 향한다는 설명이었다.

이 논리는 성화 공경을 무조건 옹호하는 감정적 주장이라기보다 성육신에 대한 해석과 연결되어 있었다. 반대편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형상을 비판하였다. 양측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

레오 4세가 사망한 뒤 섭정이 된 황후 이레네는 성상 공경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공의회는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성화와 십자가, 복음서와 유물에 합당한 공경을 드릴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다만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와 성화에 대한 공경은 서로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이 공의회는 히에레이아 회의를 폐기하고 성상 공경을 교회의 전통에 포함시켰다. 성화의 근거는 사도 시대부터 이어진 관습과 교부들의 가르침, 성육신의 현실성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오늘날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제7차 보편 공의회로 인정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비잔티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결정을 즉시 받아들인 것은 아니며, 정치 상황에 따라 다시 갈등이 이어졌다.

두 번째 성상 파괴와 843년의 회복

9세기 초 황제 레오 5세는 군사적 실패와 제국의 위기를 종교적 문제와 연결하면서 성상 반대 정책을 되살렸다. 815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회의는 787년의 결정을 뒤집고 성상 파괴 입장을 다시 채택하였다. 황제 미하일 2세와 테오필로스 시대에도 성상 공경을 옹호한 수도사와 성직자에 대한 압박이 계속되었다.

테오필로스가 사망한 뒤 황후 테오도라가 어린 아들 미하일 3세를 대신해 섭정하였다. 8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성상 공경이 다시 회복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예배가 거행되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정교회의 승리’로 기념하며 대사순절 첫째 주일에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 이 명칭과 기념 방식은 정교회의 전례 전통에 속하며, 모든 기독교 교단이 같은 방식으로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성상 파괴 논쟁의 역사적 의미

성상 파괴 논쟁은 종교 이미지에 관한 논쟁이면서 동시에 황제권과 교회 권위의 경계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비잔티움 황제는 제국의 종교적 통일을 정치적 안정과 연결하였고, 성화 문제에 개입하여 교회의 방향을 정하려 하였다. 이에 맞서 수도원과 성상 옹호자들은 신앙의 전통을 황제의 명령보다 오래된 권위로 제시하였다.

논쟁은 동방과 서방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로마 교황은 성상 파괴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비잔티움 황제와의 관계는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 및 교회 관할권 문제와 함께 악화되었다. 성상 문제 하나만으로 동서 교회가 분열된 것은 아니지만, 이 논쟁은 이미 커지고 있던 문화적·정치적 간격을 더욱 드러냈다.

또한 성화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예배에서 물질과 감각이 차지하는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동방 교회의 성화는 장식이나 개인 취향의 작품이 아니라 성경의 사건과 교회의 기억을 현재의 예배 공간에 연결하는 매개로 이해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이후 성화와 성상의 사용 방식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종교개혁기에는 교단별로 이미지에 대한 태도가 다시 갈라졌다.

역사적 구분
성상 파괴 논쟁은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이 성화를 우상으로 보았다는 뜻이 아니다. 비잔티움에서 특정 황제들이 추진한 정책, 754년 히에레이아 회의,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843년 성상 공경 회복은 서로 다른 시기의 사건이다. 후대 동방정교회의 성화 이해와 서방 교회의 성상 사용도 같은 역사적 경로를 거치지 않았다.

비잔티움 성상 파괴 논쟁은 제국의 통치권, 수도원의 사회적 역할, 교회의 전통, 성육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한 사건 안에서 충돌한 사례이다. 843년의 회복은 성화 사용의 승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황제가 교회의 신앙 전통을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지, 물질적 형상이 신앙을 가리키는 방식은 무엇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이 남긴 역사적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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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1. Leslie Brubaker and John Haldon, The Byzantine Iconoclast Controversy: History and Memory.
  2. Bissera V. Pentcheva, Icons and Power: The Mother of God in Byzant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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