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우스의 기둥은 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을까

알렉산드리아의 폼페이우스의 기둥은 폼페이우스가 세운 기념물이 아니다. 이 거대한 붉은 화강암 기둥은 서기 3세기 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관련된 정치적 기념물로 세워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기둥은 알렉산드리아가 그리스 도시에서 로마 제국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 변해 가던 시기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폼페이우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

고대 기록과 유적의 실제 조성 시기를 보면 폼페이우스와 이 기둥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은 확인되지 않는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장군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왕위 분쟁에 개입했다가 기원전 48년 이집트에서 살해되었다. 후대의 전승은 그의 무덤이나 기념물과 기둥을 연결했지만, 현재 연구에서는 이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폼페이우스의 기둥은 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을까

‘폼페이우스의 기둥’이라는 이름은 중세와 근세 유럽에서 널리 퍼진 오해가 유적명으로 굳어진 결과에 가깝다. 고대에 이 기둥이 불렸던 정확한 명칭은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 학술적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둥’ 또는 ‘세라페움의 기둥’이라는 이름이 기둥의 배경을 더 잘 설명한다.

기둥은 언제 세워졌나

기둥은 대체로 서기 298년에서 303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이 시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통치하던 때다. 3세기 로마 제국은 황제의 잦은 교체와 내전, 국경 분쟁을 겪었고, 이집트 역시 정치적 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반란을 진압한 뒤 도시를 재편하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기둥의 받침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바치는 헌정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기둥과 받침만으로는 건립 목적을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반란 진압과 황제의 질서 회복을 기념하는 성격이 강했을 가능성이 있다. 거대한 단일 석재를 세운 행위 자체가 황제의 힘과 로마의 통치 능력을 드러내는 정치적 메시지가 되었다.

세라페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기둥이 서 있는 곳은 고대 세라페움 구역이다. 세라페움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신 세라피스를 숭배하던 대규모 성역이었다. 세라피스는 이집트 전통의 오시리스와 아피스 숭배, 그리스 종교적 요소가 결합한 신으로 이해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 신을 그리스계 주민과 이집트계 주민을 연결하는 제국의 신으로 활용했다.

세라페움은 신전만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계단식 지형 위에 신전과 부속 건물, 도서관과 교육 공간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들어섰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종교·문화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현재 남은 폼페이우스의 기둥은 이 복합 성역의 중심 건물이 온전하게 보존된 모습이 아니다. 세라페움은 시간이 흐르며 훼손되었고, 기독교가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된 뒤 종교적 충돌 속에서 신전 시설이 파괴되거나 용도가 바뀌었다.

기둥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조각상과 건축 부재도 서로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유적지에 남은 모든 요소를 하나의 건설 시기에 일괄적으로 묶어 해석하면 안 된다.

붉은 화강암 한 덩어리의 구조

기둥의 몸체는 아스완 지역에서 채석한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이 돌은 나일강 상류에서 채취된 뒤 알렉산드리아까지 운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남부의 채석장과 지중해 연안의 대도시를 연결한 운송망은 로마 시대에도 계속 작동했다.

기둥의 몸체는 여러 개의 돌을 쌓은 구조가 아니라 거대한 단일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 전체 높이는 받침을 포함해 약 27m로 알려져 있으며, 몸체의 높이는 약 21m에 이른다. 정확한 측정값은 측정 범위와 받침 포함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꼭대기에는 코린트식 기둥머리가 있었지만, 현재는 기둥 몸체와 기초 부분이 주로 남아 있다.

이 규모의 화강암을 채석하고 다듬은 뒤 강과 해상로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세우려면 숙련된 석공과 운송 인력, 황실이 동원할 수 있는 행정력이 필요했다. 기둥 하나가 로마 제국의 건축 기술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나일강 유역의 자원과 도시의 항만, 제국의 세금 및 노동 체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 역사에서 남은 자리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로 성장했다. 기원전 30년 이집트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뒤에도 이 도시는 지중해 세계의 항구이자 곡물 공급 중심지로 중요한 위치를 지켰다. 폼페이우스의 기둥은 이 도시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로마 황제의 질서 안에 편입된 현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기둥이 세워졌을 때 세라페움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성역이었다. 하나의 장소에 이집트 종교, 그리스계 왕조, 로마 황제 숭배, 후기 고대의 기독교화가 차례로 겹쳐 있다. 유적의 가치는 기둥의 높이에만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아가 여러 정치 권력과 종교 전통이 만나는 도시였다는 사실이 이 한 장소에 압축되어 있다.

방문할 때 알아둘 점

  • 유적은 알렉산드리아 남서쪽의 고대 세라페움 구역에 있으며, 카타콤과 가까운 동선으로 묶어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 현장에서는 기둥의 몸체뿐 아니라 받침, 주변의 건축 부재, 지하 공간과 잔존 유구를 함께 확인해야 전체 배경을 이해하기 쉽다.
  • ‘폼페이우스’라는 이름만 보고 로마 장군의 묘나 개인 기념물로 해석하면 유적의 건립 시기와 목적을 놓치게 된다.
  • 관람 시간과 입장료는 현지 사정과 문화유산 당국의 운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출발 전 확인이 필요하다.

폼페이우스의 기둥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실제 역사는 훨씬 넓다. 아스완의 화강암, 알렉산드리아의 항구, 세라피스 숭배, 로마 황제의 통치가 하나의 기념물 안에서 만난다. 그래서 이 기둥은 알렉산드리아의 고대사를 살필 때 도시의 여러 층위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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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1. Ian Shaw (ed.),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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