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의 고대 도시, 사마리아(Samaria)
사마리아의 위치와 지정학적 특성
사마리아(Samaria)는 현대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 북부, 나블루스(Nablus) 인근의 세바스티야(Sebastia) 마을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이다. 이 지역은 도시 이름이자 동시에 지역 이름으로도 사용되며, 기원전 9세기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건설되어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오므리(Omri) 왕은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8km 떨어진 이곳을 비싼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세멜에게서 매입하였고, 그 산 위에 도시를 건설하며 그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명명하였다(열왕기상 16:24). 이후 그의 아들 아합(Ahab)은 이곳을 기반으로 22년간 통치하며 바알 신전과 아세라 상을 세워 북이스라엘의 종교 풍경에 큰 변화를 야기하였다.
사마리아의 역사적 전개
사마리아의 역사적 배경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 계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엘라 → 시므리 → 오므리 → 아합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 속에서, 오므리는 기낫의 아들 디브니와의 내전 끝에 승리하며 왕권을 장악하였다. 이 전환은 이스라엘 내부의 정치적 분열과 통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열왕기상 16장 21~24절에 명시되어 있다.
오므리와 아합의 통치기 동안 사마리아는 왕궁, 제단, 군사 요새 등 정치 권력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다양한 건축물들로 구성되었고, 이후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과 점령을 겪으며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문명 요소가 중첩되었다. 로마 통치기에는 ‘세바스테(Sebaste)’로 개칭되어 도시계획과 건축 양식이 재구성되었으며, 이 시기 경기장, 포장도로, 신전 등의 유적이 조성되었다.
고고학적 유적과 건축물
현재 사마리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의 구조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우스 신전의 기단을 비롯해 로마 양식의 극장, 고대 도로망의 흔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고대 도시의 구조와 종교적 권위, 정치 권력의 시각적 표현 방식을 고찰하는 데 유용한 사례로 평가된다.
신전 터에는 당시 사용된 원형 기둥의 일부가 남아 있어 고대 제의 공간의 규모와 양식을 유추할 수 있으며, 극장 유적은 로마적 대중 공간이 어떻게 지역 문화에 통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건축사적 단서를 제공한다. 고대 도로 흔적은 도시 내 통행 체계뿐 아니라 외부와의 연결 경로로서 사마리아가 전략적 교차로에 위치해 있었음을 방증한다.
사마리아 고대 유적지 전경
세바스티야(Sebastia)에 위치한 사마리아 고대 유적지의 모습. 사진은 로마 시대 이후로 남아 있는 석주(기둥)들의 일부로, 이곳에는 제우스 신전, 극장, 도로 등 다양한 건축 유산이 분포되어 있다. 고대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종교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후 아시리아와 로마 시대를 거치며 다층적 역사와 문화가 중첩되었다.
사마리아와 성경 서술의 관계
사마리아는 성경 내에서 자주 언급되는 도시로,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 및 종교적 중심지였다. 오므리와 아합 왕의 치세를 중심으로 바알 숭배가 제도화되었으며, 이는 예언자 엘리야와의 대립 구도에서 주요한 갈등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열왕기상 16장 29~33절에는 아합이 바알 신전을 건축하고 제단을 세운 구체적인 기록이 전해지며, 이는 사마리아가 북왕국의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 무대였음을 시사한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29-33)
사마리아는 인근 지형보다 높은 지대에 건설되어 방어에 유리하였고, 남북 및 동서를 잇는 교통망이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정치·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본래 한 도시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사마리아’는 점차 북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지칭하는 지리적 명칭으로 확장되었다(왕상 13:31-32; 21:1, 왕하 1:3; 17:24,29; 23:19, 렘 31:5).
지정학적 조건과 외세 지배의 역사
사마리아는 지정학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고지대에 위치하면서도, 곡물, 올리브, 포도 재배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를 갖춘 지역으로서 경제적 가치 또한 높았다. 이러한 풍부한 자연 조건은 종종 외세의 침입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북이스라엘 주민들은 페니키아, 시리아 등 인접 지역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외래 종교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721년경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아시리아 왕은 다수의 사마리아 주민을 타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그 빈자리에 바벨론, 구다, 하맛, 아와 등 메소포타미아계 이민족을 정착시켰다(왕하 17:6, 24; 18:11; 스 4:9-10). 이로 인해 사마리아 지역은 혈통적 혼합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혼합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여호와 숭배와 더불어 각 민족 고유의 신을 병행하여 섬기는 형태가 확산되었다(왕하 17:25-41).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24, 33)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의 전개
사마리아는 이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각 제국의 정치·문화적 영향을 수용하였다. 기원전 30년경에는 헤롯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헤롯 대왕은 사마리아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여 ‘세바스테(Sebaste)’라 명명하였다. 이 시기, 사마리아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과 요새가 건립되어 로마적 도시 특성이 강화되었다.
신약성서 속의 사마리아
신약성서에서도 사마리아는 복음 전파의 전환점으로서 주목된다.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을 배경으로 한 종교적 담론을 형성하며, 사마리아가 복음이 경계 너머로 확장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두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사마리아의 역사적 가치
사마리아는 정치·종교·문화가 교차하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 고대 도시로, 고고학적 유산과 성경의 서술이 함께 얽혀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핵심 유적으로 평가된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에서 바알 숭배의 중심지, 그리고 로마 시대의 속주 도시로 변화해온 이곳의 역사는 지역 역사와 신앙의 변천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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