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11년에서 113년 사이, 비티니아와 폰투스의 총독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로마제국의 지방 행정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이 서신에서 기독교인은 제국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비밀 결사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방 도시에서 고발되고 심문받았으며, 총독은 기존 법과 행정 관행을 적용할 수 있는지 판단하려 하였다.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의 문답은 기독교 박해가 언제나 하나의 제국 법령에 따라 일관되게 진행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플리니우스가 다스린 비티니아와 폰투스
비티니아와 폰투스는 오늘날 튀르키예 북부 흑해 연안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도시들이 많았고, 로마의 속주 행정과 지방 도시의 전통이 함께 작동하였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 출신의 플리니우스를 특별한 권한을 지닌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플리니우스는 지방의 재정과 도시 행정, 공공질서, 재판을 감독하였다. 기독교인 문제도 그가 처리해야 할 지방 행정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편지는 기독교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총독이 황제에게 법률 적용을 문의한 공문서이다.
기독교인 사건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인으로 고발된 사람들을 직접 심문하였다. 고발된 사람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였고, 일부는 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재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플리니우스는 이들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나이와 성별에 따라 구별해야 하는지, 자백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지를 황제에게 물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피고인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황제의 형상 앞에서 의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저주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응한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으로 간주되어 석방되었다. 끝까지 거부한 사람은 처벌되었다.
플리니우스가 확인한 기독교 공동체
플리니우스는 조사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특정한 날 새벽에 모여 그리스도에게 신처럼 찬송을 부르고, 도둑질과 간음과 사기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진술을 들었다. 모임이 끝난 뒤에는 평범하고 결백한 음식을 함께 먹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이 공동체가 범죄 집단인지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여성 봉사자를 고문하기도 하였다. 편지에서 플리니우스는 이들을 ‘여집사’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가 들은 내용은 기독교 예배와 윤리 생활에 관한 것이었지만, 플리니우스는 기독교를 허가된 종교 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기록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미 예배 시간, 공동 식사, 윤리적 규범, 봉사 직분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로마 행정관이 기독교인의 모임을 도시의 다른 합법적 결사와 구별하여 의심했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트라야누스의 답변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에게 기독교인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수사해서는 안 된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고발이 공식적으로 제기되고 피고인이 유죄로 확인되면 처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발된 사람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입증하고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 사면할 수 있었다.
황제는 익명의 고발장을 받아들이지 말라고도 지시하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고발은 로마의 재판 질서를 해치고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의 지침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허용한 선언도, 제국 전체에 적용되는 체계적인 박해령도 아니었다.
이 정책은 기독교인을 찾아다니지는 않지만, 공개적인 고발과 신앙의 고집이 결합되면 처벌하는 방식이었다. 기독교인에게 제사를 거부하는 행위는 신앙의 문제였지만, 로마 행정의 관점에서는 총독의 명령과 도시의 공적 질서를 거부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었다.
로마법과 기독교 박해의 관계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의 서신에는 기독교인을 처벌하는 하나의 명확한 법 조항이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지방 총독의 재판 권한, 고발 절차, 자백과 철회의 의미, 황제에게 올리는 행정 질의가 함께 나타난다. 초기 박해는 제국 전역에서 같은 강도로 시행된 정책이라기보다 지역 상황과 행정관의 판단에 따라 달라졌다.
기독교인의 이름 자체가 처벌의 근거가 되었는지, 그 이름과 함께 다른 범죄가 입증되어야 했는지는 학계에서 계속 논의되었다. 트라야누스의 답변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완전히 무해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인을 찾아내는 조직적 수사를 명령하지도 않았다.
이 점에서 비티니아의 사례는 네로 시대의 로마 박해와 구별된다. 네로 시대의 처벌은 로마 화재 이후 황제의 정치적 필요와 연결되어 대중적 처형의 형태로 나타났다. 플리니우스의 사건은 지방 행정관이 개별 고발과 심문을 통해 처리한 사례이다.
초기 교회사에서 이 서신이 중요한 이유
플리니우스의 편지는 기독교인이 자기 공동체를 설명한 문헌이 아니라, 외부 행정관이 기독교인을 관찰하고 기록한 자료이다. 따라서 그 내용에는 로마인의 오해와 편견이 포함되어 있다. 플리니우스는 기독교 예배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공공질서와 제국의 의례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이 서신은 초기 교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인은 도시 안에서 정기적으로 모였고, 그리스도를 찬송했으며, 공동체의 도덕 규범을 확인하였다. 여성 봉사자도 공동체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는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 확인되는 초기 교회의 모습이 로마의 행정 기록에서도 별도의 시각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또한 이 문서는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갈등이 처음부터 군사적 반란이나 제국 전복의 문제였던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갈등의 핵심은 예배와 충성의 경계에 있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예배 때문에 로마의 신들과 황제에게 요구된 공적 의례를 거부하였고, 로마 행정은 그 거부를 공동체 질서에 대한 불복종으로 해석하였다.
후대 박해와의 차이
트라야누스의 지침은 이후 모든 로마 황제의 정책을 결정한 고정된 법전이 아니었다. 3세기에는 황제와 제국의 위기 상황에 따라 기독교인을 겨냥한 조치가 더 넓은 범위로 시행되었고,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는 제국 전체의 명령에 따른 대박해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의 서신을 로마제국의 기독교 정책 전체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이 문서는 특정 시기, 특정 속주, 특정 행정관과 황제 사이에서 형성된 대응 원칙을 기록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제한성 때문에 초기 기독교 박해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티니아의 재판에서 기독교인은 비밀스러운 적국의 요원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공개적인 의례에 참여할 것인지, 황제의 명령 앞에서 신앙을 철회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받았다.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의 서신은 초대교회가 로마 사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예배와 시민 의무, 공동체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어떤 긴장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유스티누스 순교자와 《제1변증서》: 2세기 로마에서 기독교를 변호한 철학자
- 로마의 클레멘스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1세기 교회의 질서와 권위
-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왜 시작되었는가: 로마제국의 마지막 대박해와 기독교의 전환
참고문헌·더 읽을거리
- Robert Louis Wilken, The Christians as the Romans Saw Them.
- Pliny the Younger, translated by Betty Radice, Pliny the Younger: Selected Letters.
성경의 땅과 역사에 관한 더 많은 글 → 네이버 블로그 바로가기
핑백: aetov.com – 중동·유럽 역사·문화·종교·여행·성지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