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투스파 논쟁은 4세기 북아프리카 교회를 둘로 나눈 교회 분열이다. 논쟁의 출발점은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때 성경과 교회 물품을 로마 당국에 넘긴 성직자가 박해가 끝난 뒤 다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갈등은 성직자의 개인적 잘못을 판단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았다. 박해를 견딘 교회가 누구에게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 성례의 효력이 집례자의 도덕적 순결에 달려 있는지, 황제의 개입이 교회 분열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가 남긴 상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303년부터 로마제국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교회 건물의 파괴, 성경 문서의 압수, 성직자의 체포와 희생이 이어졌지만 지역마다 집행의 강도와 방식은 달랐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성경을 제출하거나 교회 재산을 넘긴 사람을 가리키는 ‘트라디토레스’라는 표현이 훗날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박해가 끝난 뒤 교회는 두 부류로 갈렸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다 투옥되거나 죽은 이들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압력을 받아 문서를 넘겼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 상황은 개인마다 달랐으며, 협력의 정도와 강압의 수준을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카르타고의 감독 선출과 분열
북아프리카의 중심 도시 카르타고에서는 멘수리우스 감독이 죽은 뒤 카이킬리아누스가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311년 무렵 이루어진 이 선출을 둘러싸고 반대 세력이 생겼다. 반대파는 카이킬리아누스의 서품에 참여한 펠릭스가 박해 당시 성경을 넘긴 트라디토레스였다고 주장하였다.
반대파는 카이킬리아누스의 선출을 인정하지 않고 마요리누스를 별도의 감독으로 세웠다. 마요리누스가 곧 죽은 뒤에는 도나투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여기서 이름을 얻은 도나투스파는 자신들이 박해를 견딘 순수한 교회의 전통을 지킨다고 주장하였다.
도나투스파의 주장은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와 교회의 거룩함을 긴밀하게 연결하였다. 박해 때 배교하거나 협력한 성직자가 집례한 성례는 정당하지 않으며, 그러한 성직자에게서 받은 세례도 다시 받아야 한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였다. 반대편에서는 성례의 효력이 집례자의 완전한 도덕성에 달려 있다면 교회 공동체의 신앙과 질서가 끊임없이 흔들릴 수 있다고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입
밀라노 칙령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에 압수되었던 재산을 돌려주고 분쟁 중인 교회에 재정 지원을 제공하려 하였다. 황제에게는 어느 쪽이 합법적인 감독인지 결정하는 일이 행정 문제이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교회가 분열된 상태로 남으면 재산 반환과 교회 조직의 관리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먼저 로마에서 열린 회의에 사건을 회부하였다. 313년 로마 회의는 카이킬리아누스를 지지하였고, 도나투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나투스파는 이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황제는 더 넓은 지역의 감독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소집하였다.
아를 공의회와 제국 법정의 한계
314년 아를에서 열린 회의는 카이킬리아누스의 지위를 다시 인정하였다. 회의는 박해 시기에 성경을 넘긴 성직자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러한 행위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집례한 성례를 모두 무효로 돌리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직자의 죄와 교회의 성례를 구분하려는 방향이었다.
도나투스파는 아를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에는 양쪽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분열이 계속되자 도나투스파 교회에 대한 압박과 재산 몰수를 명령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공동체와 성직자들이 생겼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적인 충돌도 일어났다.
도나투스파 논쟁에서 말하는 ‘배교’와 ‘성경을 넘김’은 모든 성직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 사실이 아니다. 박해 당시의 행위와 이후의 전승은 지역과 인물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었다. 논쟁의 핵심은 특정 인물의 행적뿐 아니라 그 행적을 근거로 교회와 성례 전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도나투스파가 지속된 이유
제국의 판결이 도나투스파를 곧바로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 북아프리카의 많은 신자들은 이 논쟁을 교리 문구의 차이보다 지역 교회의 정체성과 연결된 문제로 받아들였다. 박해를 견딘 사람들과 그 후계자들은 제국이 인정한 감독보다 자신들의 공동체가 순교자들의 기억을 더 충실하게 지킨다고 생각하였다.
도나투스파는 자체 감독과 성직자, 예배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북아프리카의 도시와 농촌에 여러 공동체가 존재했기 때문에 국가의 명령만으로 조직을 해체하기도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도나투스파와 카이킬리아누스 계열 교회는 오랫동안 같은 지역에서 경쟁하였다.
이 분열은 사회적 긴장과도 맞물렸다. 로마 행정과 도시 엘리트에 가까운 교회 지도자들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박해와 토지 문제, 지역 공동체의 자율성에 대한 불만이 종교적 논쟁과 결합하였다. 다만 도나투스파를 하나의 사회 계층이나 정치 운동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안에도 다양한 지역과 입장이 존재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파 논쟁
5세기 초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교회의 일치가 특정 성직자 집단의 도덕적 완전성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회 안에는 의로운 사람과 죄를 짓는 사람이 함께 있으며,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논리를 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와 성찬 같은 성례의 효력이 집례자의 인격적 완전성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성례는 교회가 보존하고 집례하는 것이며, 성례의 근거를 인간의 순결에 두면 누구도 확실한 신앙의 보증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리는 훗날 서방 교회의 성례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설득과 논쟁을 통한 화해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분열이 지속되고 충돌이 반복되자 국가의 강제 조치를 제한적으로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용한 강제와 교회의 일치에 관한 논리는 이후 서방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411년 카르타고 회의
도나투스파와 카이킬리아누스 계열의 대립은 411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대규모 회의에서 다시 다루어졌다. 이 회의에는 양쪽을 대표하는 주교들이 참여하였고, 로마 정부의 관리가 절차를 감독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북아프리카 교회의 합법적 계통을 판단하고 분열을 끝내는 데 있었다.
회의는 카이킬리아누스 계열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도나투스파의 교회와 성직자들은 법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놓였고, 이후 여러 조치로 공동체의 활동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도나투스파 전통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으며, 북아프리카에서 한동안 독자적인 교회 공동체로 존속하였다.
도나투스파 논쟁의 역사적 의미
도나투스파 논쟁은 박해 이후 교회가 맞닥뜨린 회복의 문제를 보여준다. 배교하거나 협력한 사람을 다시 받아들일 것인지, 다시 받아들인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그가 수행한 성례를 인정할 것인지가 실제 공동체의 존립을 결정하는 사안이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콘스탄티누스 이후 황제와 교회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박해받던 교회는 황제의 보호와 재산 반환을 얻었지만, 동시에 내부 분열이 제국 행정과 법정의 문제로 바뀌는 상황을 경험하였다. 교회 회의의 결정은 이제 국가의 권력과 분리된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도나투스파는 가톨릭교회가 주장한 정통 교회론에 의해 배제된 전통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 제기는 박해를 견딘 신자들의 기억과 교회의 거룩함에 대한 진지한 관심에서 나왔다. 이 논쟁은 초대교회가 박해와 공인 사이에서 어떤 교회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 했던 역사적 갈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 5세기 교회가 인간과 은총을 둘러싸고 충돌한 이유
-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왜 시작되었는가: 로마제국의 마지막 대박해와 기독교의 전환
-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313년 종교 관용과 로마제국의 전환
참고문헌·더 읽을거리
- W. H. C. Frend, The Donatist Church: A Movement of Protest in Roman North Africa.
- G. R. Evans, Sacred Violence: African Christians and Sectarian Hatred in the Age of Augustine.
성경의 땅과 역사에 관한 더 많은 글 → 네이버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