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중엽 모라비아의 통치자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 왕국의 성직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백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를 가르칠 교사를 비잔티움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 미카엘 3세와 총대주교 포티오스는 이 요청에 테살로니키 출신의 형제 콘스탄티노스와 메토디우스를 보냈다.
콘스탄티노스는 훗날 수도원에서 키릴로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두 형제는 모라비아에서 슬라브어로 성경과 예배문을 번역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이 선교는 새로운 지역에 교리를 전달한 사건을 넘어, 누가 예배 언어를 결정하고 어느 교회가 성직자를 통제할 것인지를 둘러싼 중세 유럽의 권력 문제로 이어졌다.

모라비아의 요청과 비잔티움의 선교
모라비아 대공국은 9세기 중부 유럽에서 세력을 넓히던 정치 공동체였다. 기독교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졌지만, 모라비아의 지배층은 독일어권 성직자와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을 경계하였다. 라스티슬라프가 황제에게 교사를 요청한 배경에는 신앙 교육과 함께 정치적 자율성을 지키려는 계산도 있었다.
콘스탄티노스와 메토디우스는 테살로니키에서 자라 슬라브어 방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테살로니키 주변에는 슬라브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형제가 현지 언어 환경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두 사람이 모라비아에서 사용한 언어가 어떤 특정한 현대 슬라브어와 완전히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글라골 문자의 탄생
슬라브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문자와 번역이었다. 슬라브어를 기록할 적절한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스는 선교를 앞두고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마련하였다. 오늘날 이 문자는 글라골 문자라고 부른다. 초기 글라골 문자의 형태는 그리스 문자와 달랐으며, 슬라브어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한 기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두 형제와 그 동료들은 복음서와 시편을 비롯한 예배 관련 문헌을 슬라브어로 옮겼다. 이 번역의 언어는 오늘날 고대 교회 슬라브어 또는 고대 슬라브어라고 부른다. 당시의 언어와 현대 러시아어·불가리아어·세르비아어 같은 언어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이 문어는 여러 슬라브 지역에서 기독교 문화를 기록하는 공통 기반이 되었다.
키릴로스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문자는 글라골 문자이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키릴 문자는 키릴로스의 이름을 기념하여 붙은 이름이지만, 그의 생전에 완성된 문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키릴 문자는 9세기 말 이후 불가리아의 문학 중심지에서 글라골 문자와 그리스 문자의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된다.
모라비아에서 벌어진 전례 언어 논쟁
두 형제의 선교는 모라비아에서 호응을 얻었지만, 기존에 활동하던 서방 성직자들과 충돌하였다. 갈등의 핵심에는 성직자 관할권과 예배 언어가 있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던 바이에른계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했고, 슬라브어 예배가 교회의 전통에 맞는지도 문제로 제기하였다.
당시 서방 교회 일부에서는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언제나 이 세 언어만 허용했다는 식으로 상황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실제 논쟁은 지역별 관행, 성직자들의 관할권, 로마와 비잔티움 사이의 관계가 겹친 복합적인 갈등이었다.
로마 방문과 교황의 승인
867년 무렵 콘스탄티노스와 메토디우스는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향하였다. 두 형제는 모라비아 선교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자신들이 번역한 예배문과 성직자 교육 문제를 로마 교회와 협의하려 하였다. 이들은 로마로 성 클레멘스의 유해를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성 클레멘스는 로마의 초기 감독으로 기억되던 인물이었다.
당시 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는 슬라브어 예배문을 검토하고 이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콘스탄티노스는 로마에서 수도자가 되어 키릴로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얼마 뒤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산 클레멘테 성당에 안치되었다고 전해진다.
메토디우스는 로마에서 주교로 서품되었고,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역에서 형제의 선교를 이어 갈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로마의 승인이 현지 갈등을 곧바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메토디우스는 독일계 성직자들과 관할권을 둘러싸고 계속 충돌하였다.
메토디우스의 투옥과 교황의 개입
메토디우스는 870년 무렵 바이에른 성직자들의 압력으로 체포되어 수년 동안 구금되었다. 그가 맡은 판노니아와 모라비아의 교회 관할권을 둘러싼 갈등이 투옥의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이는 슬라브어 예배에 대한 논쟁이 교리 문제만이 아니라 주교의 권리와 지역 교회의 통제권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교황 요한 8세는 메토디우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메토디우스는 풀려난 뒤 모라비아로 돌아갔지만, 슬라브어 전례를 둘러싼 제한과 조건은 계속되었다. 로마 교회는 지역 상황에 따라 슬라브어 사용을 인정하면서도 라틴어와의 관계, 성직자 교육, 예배 질서를 함께 통제하려 하였다.
메토디우스 이후의 추방과 불가리아의 계승
메토디우스는 885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은 뒤 모라비아에서 슬라브어 전례와 그의 제자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려웠다. 스바토플루크의 통치 아래 라틴계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졌고, 메토디우스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모라비아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추방은 선교의 완전한 소멸로 이어지지 않았다. 클리멘트, 나움, 안젤라리우스 등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로 이동하였다.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 형성된 문학 중심지에서 이들은 슬라브어 문헌과 성직자 교육을 발전시켰다. 프레슬라프와 오흐리드 지역은 이후 슬라브 기독교 문화를 확산시키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키릴 문자는 이 계승 과정에서 발전하였다. 키릴로스가 직접 키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승이 널리 퍼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그의 제자들과 불가리아의 문인들이 앞선 번역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자와 문헌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보는 설명이 더 신중하다.
동유럽 교회사에서 남긴 의미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의 선교는 한 지역의 개종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형제가 마련한 문자와 번역 전통은 불가리아를 거쳐 세르비아와 키예프 루스 등 동유럽의 여러 기독교 공동체에 영향을 주었다. 각 지역의 수용 과정은 서로 달랐고, 교회 조직과 정치 권력의 관계도 동일하지 않았다.
이들의 유산은 비잔티움과 로마 가운데 어느 한쪽의 영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선교의 출발점은 비잔티움이었지만, 로마 교회의 승인과 갈등 조정도 중요한 단계였다. 이후 제자들이 불가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슬라브어 문헌 문화가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았다. 서로 다른 교회 전통과 지역 정치가 번역, 문자, 전례를 통해 만난 사건이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의 이야기는 중세 교회에서 예배 언어가 결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어떤 언어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가는 신앙 교육의 범위와 성직자의 권한, 지역 공동체의 문화적 자립과 연결되어 있었다. 9세기 모라비아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훗날 동유럽 기독교 문명의 문자와 문헌을 형성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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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 Francis Dvornik, Byzantine Missions among the Slavs: SS. Constantine-Cyril and Method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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