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왜 열렸는가: 381년 니케아 신앙의 재확인과 성령 논쟁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계속된 삼위일체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 열린 회의이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제한하려는 여러 입장에 맞서 니케아 신앙을 재확인하고, 성령에 관한 교회의 이해를 공식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회의는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배에서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연결된다. 다만 현재 전해지는 신경의 문장이 381년 회의에서 어떤 방식으로 확정되었는지, 기존 니케아 신경을 회의가 직접 수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헌과 역사적 정황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응하였다. 아리우스는 성자가 하나님과 같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창조된 존재라고 보았고, 이에 반대하는 주교들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고 고백하였다. 니케아 신경에 들어간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은 이 논쟁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니케아의 결정을 둘러싼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제와 지방 행정관의 정치적 지원이 어느 쪽에 향하는지에 따라 주교들이 추방되거나 복귀하였고, 동방의 여러 교회에서는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을 불편하게 여기는 흐름도 나타났다. 서방과 동방의 신학적 언어와 교회 정치가 서로 달랐다는 점도 논쟁을 오래 끌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공의회를 소집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379년 동방의 황제가 된 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였다. 그는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을 통해 니케아 주교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가 가르치는 신앙을 제국의 정통 신앙으로 제시하였다. 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직을 정비하고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주교들을 모아 공의회를 열었다.

공의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되었다. 참석자 대부분은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었으며, 로마의 주교가 직접 참석한 회의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회의를 이끌었지만, 그는 안티오키아 주교직을 둘러싼 문제와 회의 운영에 대한 부담 속에서 사임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넥타리오스가 회의를 이끌었다.

성령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

381년 공의회의 중요한 쟁점은 성령의 지위였다. 일부 집단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처럼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한 능력이나 피조물에 가까운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들은 후대에 ‘성령을 대적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마케도니우스파’ 또는 ‘성령 논쟁자들’로 불렸다. 이 명칭이 당시 모든 반대자에게 정확하게 적용되는지는 역사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다.

공의회는 성령을 생명을 주는 분이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는 분으로 고백하였다. 성령을 피조물로 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고백한 것이다. 공의회의 결정은 성령론을 독립된 교리 항목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라기보다, 니케아가 시작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관한 신앙고백을 성령에게까지 확장한 역사적 대응이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형성

오늘날 ‘니케아 신경’ 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 부르는 신앙고백은 니케아 신경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381년 공의회가 신앙고백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고대 자료에서 확인되지만, 현재의 신경 전체가 그 회의에서 어떤 문서 과정을 거쳐 채택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신경은 성령에 관한 내용을 더 길게 서술하며,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 하나의 세례,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명을 함께 고백한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이 신경을 니케아 신앙과 함께 공적으로 인정하였다. 그 이후 이 신경은 동방과 서방의 예배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역사적 구분
381년 공의회가 현재 형태의 신경을 완성하였다는 설명은 교회 전통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고대 회의 기록은 제한적이며, 현존하는 신경의 문장과 회의의 직접적인 결정문 사이에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따라서 ‘381년 공의회가 니케아 신앙을 확장하고 성령에 관한 고백을 확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안전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적 지위를 둘러싼 결정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에게 로마 다음의 명예상 우선권을 부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 근거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 로마라는 점이었다. 로마가 오래된 수도로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황제의 거처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국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그 다음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결정은 신학적 교리만이 아니라 제국의 행정 질서와 교회 서열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 교회는 이 조항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위를 둘러싼 논쟁은 동서 교회의 관계에 계속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명예 순위가 도시의 정치적 위상과 결합한 사례이기도 하다.

공의회가 남긴 역사적 의미

381년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의 반복이 아니었다. 니케아에서 제기된 성자의 신성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성령을 포함한 교회의 신앙고백을 더 분명하게 정리한 회의였다. 또한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고 제국의 공적 신앙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국가 권력과 교회 제도가 긴밀하게 얽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회의의 결정은 모든 지역에서 즉시 동일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동방의 여러 교회와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용어와 전통을 사용했고,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와 관련된 논쟁은 일부 지역에서 이어졌다. 그럼에도 381년의 결정은 4세기 후반 정통 신앙의 기준을 형성하였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와 이후의 교회 전통에서 중요한 권위를 얻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니케아 신앙이 한 번의 회의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황제와 주교들, 지역 교회와 신학자들이 오랜 논쟁을 거치며 해석하고 재확인한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익숙한 신앙고백 뒤에는 성령의 신성, 공의회의 권위, 교회와 제국의 관계를 둘러싼 4세기 교회의 복잡한 역사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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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1. Leo Donald Davis, The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2. Lewis Ayres, The Nicene Faith: Formation of Christian Theology, 3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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