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왜 시작되었는가: 로마제국의 마지막 대박해와 기독교의 전환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303년부터 로마제국 곳곳에서 시행된 마지막 대규모 기독교 박해이다. 박해를 명령한 황제의 이름을 따서 부르지만, 실제 정책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공동 황제들, 그리고 지역 행정관들의 판단이 함께 작용하여 진행되었다.

이 박해는 기독교가 오랫동안 겪은 여러 지역적 탄압과 달리 제국 전체의 행정 체계를 사용하였다. 교회 건물과 성경 사본의 파괴, 성직자 체포, 로마의 전통적 제사 참여 강요가 이어졌지만 지역마다 강도와 기간은 달랐다. 박해가 끝난 뒤 교회는 순교자뿐 아니라 박해 중 신앙을 포기하거나 타협한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제국과 종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84년 황제가 된 뒤 정치와 군사 체계를 크게 개편하였다. 넓은 영토를 한 명의 황제가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여러 황제가 역할을 나누는 사두정치 체제를 발전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방을, 막시미아누스는 서방을 담당했고, 뒤이어 카이사르로 임명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통치 질서를 보조하였다.

이 체제에서 황제의 권위는 군사력만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로마의 전통적 신들과 황제에 대한 경배는 제국의 질서와 충성을 드러내는 공적 행위로 이해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제사와 황제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일은 로마의 종교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질서에 대한 불충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3세기 후반 기독교 공동체는 이미 여러 도시에서 성장하였다. 교회는 감독과 장로, 집사로 이루어진 조직을 갖추었고 예배 장소와 성경 사본도 보유하고 있었다. 황제와 행정관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의 비밀 결사로만 취급하기 어려운 집단이 되었다.

박해가 시작된 배경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처음부터 기독교 박해를 일관되게 추진한 것은 아니다. 박해 이전에도 기독교인들은 로마 군대와 행정 조직 안에 있었고,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신들의 관계, 군대의 충성 의례, 황제의 종교적 권위를 둘러싼 긴장이 점차 커졌다.

갈레리우스는 기독교를 제국의 전통적 질서를 위협하는 집단으로 보는 데 더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302년경 궁정과 군대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를 둘러싼 조치가 논의되었고, 303년에는 박해를 제국의 공식 정책으로 만드는 칙령들이 발표되었다. 고대 자료는 이 과정에서 황제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각 인물의 정확한 동기와 대화 내용은 자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303년 칙령과 박해의 단계

첫 번째 칙령은 교회 건물을 파괴하고 성경과 예배 문서를 압수하며, 기독교인들이 법적 특권을 잃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가 철거되고 성경 사본이 불태워졌다.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초기에는 공동체의 지도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강하게 나타났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조치는 성직자 체포와 석방 조건을 다루었다. 고위 성직자들을 붙잡아 제사 참여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처벌하는 방식이었다. 네 번째 칙령은 제국 주민 전체에게 공적 제사에 참여하도록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단계에서 박해는 교회 재산의 압수나 지도자 체포를 넘어 모든 기독교인의 종교 행위를 겨냥하였다.

칙령의 적용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같지 않았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통치한 서방의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 건물 파괴가 시행되었지만 인명 피해와 강제 제사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반대로 동방과 아프리카에서는 더 오랜 기간 강한 조치가 이어졌다.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통치한 지역에서도 박해가 지속되었다.

박해의 지역적 차이
‘대박해’라는 이름은 제국 전체를 포괄한 정책을 가리키지만, 모든 도시에서 같은 사건이 같은 강도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희생자 수와 순교 일화는 지역 문헌과 후대 전승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므로, 개별 순교 이야기와 제국 정책 전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성경 사본과 ‘배교자’ 문제

박해가 남긴 가장 심각한 교회 내부의 문제는 성경 사본과 성물을 행정관에게 넘긴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였다. 이들을 라틴어로 ‘트라디토레스’라고 불렀다. 이 말은 ‘넘겨준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박해 중 성경을 제출했거나 제출했다고 의심받은 성직자와 신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박해가 끝난 뒤 일부 교회는 이들의 행위를 배교로 보아 성직 임명과 성례의 정당성까지 문제 삼았다. 북아프리카에서는 4세기 초 카르타고의 세실리아누스가 감독으로 임명된 일을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났다. 그의 임명에 참여한 성직자가 박해 중 사본을 넘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도나투스파 논쟁으로 발전하여 북아프리카 교회의 장기간 분열을 낳았다.

이 문제는 박해받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을 단순히 선인과 악인으로 나눌 수 없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제사를 드렸고, 어떤 사람은 허위 증명서를 사거나 행정관의 요구를 피했으며, 어떤 사람은 사본을 숨겼다. 교회는 서로 다른 상황을 어떻게 판정할지 결정해야 했다.

박해의 종결과 311년 관용 조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박해는 곧바로 끝나지 않았다.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동방에서 정책을 이어갔고, 서방에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아래 박해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311년 갈레리우스는 니코메디아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는 관용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기독교인들이 다시 모임을 갖고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제국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라고 요구했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관용은 현대적 의미의 종교 자유와 같지 않았다.

갈레리우스의 조치는 박해 정책이 기독교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전환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발표한 밀라노의 합의는 이보다 더 넓은 종교적 자유와 재산 반환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311년의 관용 조치와 313년의 정책 전환은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문서나 같은 사건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남긴 의미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강제로 제거하려 한 마지막 큰 시도였다. 박해는 교회 건물과 문서를 파괴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했지만, 여러 지역의 공동체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박해 이후 교회는 순교와 신앙의 충실성을 기억하는 방식, 성직자의 권위, 배교자의 회복을 둘러싼 제도적 논의를 발전시켰다.

후대 기독교 문헌은 이 시기의 순교자들을 신앙의 증인으로 기념하였다. 그러나 모든 순교 기록이 같은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보존한 것은 아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와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은 박해의 기억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기록 목적과 지역적 범위를 고려하여 읽어야 한다.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역시 황제들의 몰락을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 문헌이다.

이 박해의 역사는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관계가 박해에서 곧바로 우호 관계로 바뀐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311년과 313년의 조치는 오랜 갈등과 행정적 계산, 황제들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다. 박해를 견딘 교회는 이후 제국의 보호를 받는 교회로 변해 갔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특권과 새로운 정치적 책임을 함께 떠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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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1. William H. C. Frend, The Great Persecution: The Imperial Persecution of Christians, AD 303–313.
  2. Stephen Williams, Diocletian and the Roman Reco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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