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 신전 오벨리스크는 왜 한 쌍 중 하나만 남았을까

룩소르 신전 입구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 두 개였다. 람세스 2세는 신전의 첫 번째 탑문 앞에 붉은 화강암 오벨리스크 한 쌍을 세웠고, 두 기둥은 왕의 통치와 태양신의 힘을 과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늘날 룩소르에 남은 것은 서쪽 기둥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19세기에 프랑스로 옮겨져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다.

신전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기념비

룩소르 신전의 정면은 람세스 2세가 확장한 거대한 탑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문 앞에는 왕의 거대한 좌상과 오벨리스크가 배치되어 방문자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기 전 왕권의 규모를 마주하게 했다. 오벨리스크는 네 면이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긴 사각기둥이며, 꼭대기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피라미디온이 놓인다.

룩소르 신전 오벨리스크는 왜 한 쌍 중 하나만 남았을까

이 배치는 장식적인 입구 설계에 그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신전은 신과 왕의 질서가 구현되는 장소였고, 탑문과 오벨리스크는 그 질서의 경계를 표시했다. 신전 안쪽으로 이어지는 축선과 하늘을 향한 기둥의 수직선은 지상의 성역을 태양과 연결하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벨리스크는 무엇을 상징했을까

오벨리스크의 형태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 숭배와 관련된다. 이집트어로 오벨리스크를 가리키는 명칭은 벤벤 돌과 연결되며, 창조의 시작 때 원초의 언덕 위로 처음 나타난 태양의 빛을 떠올리게 했다. 꼭대기의 작은 피라미드 부분은 태양 광선을 받는 면으로 해석되었다.

오벨리스크는 태양신 라의 상징으로만 고정되지 않았다. 신전의 주신과 왕의 이름도 함께 새겨졌기 때문이다. 룩소르 오벨리스크에는 람세스 2세의 왕명과 그가 신들에게 봉헌한 사실을 나타내는 상형문자 비문이 있다. 비문은 왕을 신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표현하며, 신전 건립과 제사의 질서를 왕의 업적으로 기록한다.

이런 이유로 오벨리스크는 종교 기념물이면서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무게가 큰 화강암을 채석하고 나일강을 통해 운반한 뒤 세워 올리는 작업은 국가의 조직력과 왕권의 통제력을 보여주는 사업이었다. 기둥에 새겨진 이름은 왕의 통치를 돌에 고정하고, 신전 의례가 계속되는 동안 그의 존재를 기억하게 했다.

아스완 화강암으로 만든 거대한 돌기둥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는 아스완 지역에서 채취한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아스완은 나일강 상류에 자리한 대표적인 화강암 산지였으며, 고대 이집트의 대형 조각과 기념비에 필요한 돌을 공급했다. 오벨리스크는 여러 조각을 쌓아 만든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의 돌에서 깎아낸 단일석이었다.

채석장에서는 암반 표면에 오벨리스크의 윤곽을 표시한 뒤 주변을 파고,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돌을 분리했다. 완성된 기둥을 강가로 옮긴 다음 배에 실어 나일강 하류로 운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전 앞에 도착한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과정은 정확한 계산과 대규모 노동을 필요로 했다. 고대 이집트 기술자들이 사용한 구체적인 인양 방식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흙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밧줄과 지렛대를 이용했다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제시된다.

기둥의 표면은 세운 뒤 다듬은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눕힌 상태에서 정교하게 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네 면의 비문과 꼭대기의 형태를 완성한 뒤 세로로 세웠을 것이다. 완성된 오벨리스크는 신전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는 수직 표지가 되었다.

왜 한 기둥은 파리로 옮겨졌을까

룩소르에 남은 오벨리스크가 원래 한 쌍의 일부라는 사실은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두 오벨리스크를 프랑스에 제공했다. 프랑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서쪽 기둥은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운반되었다.

운반에는 특별히 제작된 선박이 사용되었다. 오벨리스크를 눕혀 배에 싣고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에 도착시키는 과정은 기술적으로 큰 사업이었다. 파리의 오벨리스크는 1836년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졌다. 룩소르 신전의 한 쌍을 이루던 기념비가 서로 다른 두 나라의 도시 공간에 자리하게 된 순간이다.

룩소르에 남은 오벨리스크의 짝이 이동한 배경에는 19세기 유럽의 이집트 유물 수집과 외교 관계가 함께 놓여 있다. 당시에는 고대 유적을 유럽으로 옮기는 일이 오늘날과 같은 문화유산 반환 원칙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파리의 오벨리스크는 프랑스와 이집트의 교류를 보여주는 동시에,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고대 유산이 이동한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룩소르 신전에서 오벨리스크를 보는 방법

오벨리스크는 룩소르 신전의 정문인 람세스 2세 탑문 앞에 있다. 카르낙 신전에서 이어지는 스핑크스 길의 방향을 따라 접근하면 신전의 정면 축과 오벨리스크의 배치를 함께 이해하기 쉽다. 낮에는 붉은 화강암 표면과 상형문자 비문을 관찰할 수 있고, 해가 낮아지면 기둥의 긴 그림자가 탑문과 광장에 드리운다.

  • 오벨리스크와 탑문을 함께 보려면 신전 정면에서 조금 물러나 전체 축선을 확인한다.
  • 기둥의 네 면에 새겨진 상형문자는 람세스 2세의 왕명과 신에게 바치는 봉헌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 오벨리스크만 따로 보지 말고 양옆의 거대한 왕상, 탑문, 안뜰과 함께 살펴보면 원래의 대칭 구성을 상상하기 쉽다.
  •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비교하면 룩소르에 남은 기둥이 한 쌍의 일부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룩소르 오벨리스크는 신전 앞에 남은 오래된 돌기둥 하나가 아니다. 람세스 2세의 왕권, 태양 숭배, 아스완에서 룩소르까지 이어진 석재 운송 기술, 그리고 19세기 유물 이동의 역사가 한 기념비 안에 겹쳐 있다. 한때 같은 입구를 지키던 두 기둥이 오늘날 룩소르와 파리에 나뉘어 서 있다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 유산이 현재의 세계사와도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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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1. Ian Shaw (ed.),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2. Toby Wilkinson, The Rise and Fall of Ancient Egypt. Bloomsbury,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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