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림(Purim)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대인이 살아남은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교 절기이다. 이야기는 히브리 성경의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왕비 에스더와 사촌 모르드개가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푸림은 유대력 아달월 14일에 지킨다. 성벽이 있던 도시에서는 아달월 15일에 지키며, 이 날을 ‘수산 푸림’이라고 부른다. 에스더서의 사건이 수산 성에서 하루 더 이어졌다는 서술에서 비롯된 구분이다.

에스더서에 나타난 푸림의 배경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스의 통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왕의 이름은 아하수에로스로 나오며,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와 연결된다. 다만 에스더서의 세부 내용과 역사적 배경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학자와 전통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유대인 모르드개는 왕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지만, 왕의 신하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다. 하만은 이를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유대인 전체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특정 날짜를 제비로 정했으며, 이 제비를 히브리어로 ‘푸르’라고 부른다. 절기 이름 푸림은 이 말의 복수형에서 유래한다.
왕비 와스디가 폐위된 뒤 왕비가 된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왕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모르드개의 요청을 받은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 하만의 계획을 폭로한다. 결국 하만의 음모는 무너지고, 모르드개는 높임을 받으며 유대인에게 자신을 방어할 권한이 주어진다.
푸림이라는 이름과 절기의 의미
‘푸르’는 제비 또는 추첨을 뜻하는 말이다. 하만은 제비를 뽑아 유대인을 공격할 날짜를 정했지만, 그 날짜는 유대인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기억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푸림은 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 시작된 절기라기보다, 정해진 운명처럼 보였던 상황이 뒤집힌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에스더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 날들을 잔치와 기쁨, 서로 음식을 보내고 가난한 이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지키도록 정한다. 후대 랍비 전통은 이 본문을 바탕으로 푸림의 핵심 실천을 구체화하였다.
푸림에 지키는 네 가지 실천
에스더 두루마리 낭독
푸림의 중심 의식은 에스더 두루마리, 곧 ‘메길라트 에스테르’를 읽는 일이다. 회당에서는 푸림 전날 밤과 푸림 당일 아침에 에스더서를 낭독한다. 전통적으로 이 낭독은 기록된 본문을 담은 양피지 두루마리로 진행한다.
낭독 중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참석자들이 소리를 내어 이름을 지우려는 관습이 있다. 나무로 된 소리 도구를 흔들거나 발을 구르는 지역 전통도 있다. 이 행동은 본문을 듣지 않으려는 뜻이 아니라 하만에 대한 기억을 거부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낭독자는 참석자가 내는 소리가 잦아든 뒤 본문을 계속 읽는다.
음식 선물 교환
푸림에는 친구와 이웃에게 음식 꾸러미를 보낸다. 이를 미슐로아흐 마노트(mishloach manot)라고 한다. 보통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나 음료를 두 종류 이상 묶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에스더서가 말하는 기쁨과 공동체적 관계를 생활 속에서 표현하는 행위이다.
가난한 이에게 주는 선물
마타노트 라에브요님(matanot la-evyonim)은 가난한 이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푸림의 기쁨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도록,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돈이나 음식을 나눈다. 전통적으로 적어도 두 명의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방식이 강조되며, 실제 공동체에서는 회당이나 자선기관을 통해 전달하기도 한다.
푸림의 식사
푸림에는 특별한 식사인 세우닷 푸림을 마련한다.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먹고 마시며 절기의 기쁨을 나눈다. 음식과 음료 자체보다 서로를 돌보고 공동체의 생존을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 중심에 있다.
에스더 금식과 푸림 전날
푸림 전날에는 에스더 금식, 곧 타아닛 에스테르를 지키는 관습이 있다.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유대인 공동체가 금식했다는 에스더서의 이야기를 기념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금식하지만, 건강 상태나 임신·수유 여부 등에 따라 금식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에스더 금식은 욤 키푸르와 같은 속죄일의 금식과 성격이 다르다. 욤 키푸르는 유대력에서 가장 엄숙한 금식일이지만, 에스더 금식은 푸림을 준비하고 위기 속에서 함께 기도한 사건을 기억하는 날이다.
푸림의 웃음과 변장
푸림에는 가면과 의상을 착용하고 연극이나 풍자 공연을 즐기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다. 에스더서에서 신분과 계획이 감추어졌다가 드러나는 구조, 그리고 예상과 반대되는 결말이 이러한 관습과 연결된다. 유대인 공동체는 푸림에 하만과 왕궁을 풍자하는 공연인 푸림슈필을 열기도 한다.
하만의 이름을 본떠 만든 과자인 하만타셴도 여러 지역에서 먹는다. 삼각형 모양의 반죽 안에 양귀비씨, 잼, 초콜릿 등을 넣는 음식이다. 이 음식이 언제부터 푸림의 상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지만, 에스더서에 실제로 하만타셴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성경 본문에 기록된 의식이 아니라 후대 유럽 유대인 사회에서 발전한 음식 관습이다.
술을 마시는 관습과 그 해석
탈무드에는 푸림에 사람이 ‘하만을 저주하는 것’과 ‘모르드개를 축복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때까지 마셔야 한다는 유명한 표현이 있다. 이 문구는 푸림의 반전과 환희를 강조하는 전통으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이 이 표현을 과도한 음주에 대한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중세와 근대의 랍비들은 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하거나, 평소보다 좋은 식사를 하는 것으로 의미를 충족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현대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여 술을 마시지 않는 선택도 널리 인정된다.
기도와 예배에서의 푸림
푸림에는 아미다와 식사 후 감사 기도에 ‘알 하니심’이라는 감사 문구를 덧붙인다. 이 문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베푼 구원과 기적을 기억하는 내용이다. 푸림은 토라에 규정된 순례 절기와는 다르므로, 유월절이나 수코트처럼 특별한 순례 의식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푸림에는 일반적으로 할렐을 공식적으로 낭독하지 않는다. 랍비 전통은 에스더서 자체가 푸림의 구원을 공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이 점은 하누카처럼 특별한 빛의 의식과 할렐 낭독이 중심이 되는 절기와 푸림이 다른 부분이다.
성경의 푸림과 후대 유대교의 푸림
에스더서는 아달월의 잔치와 기쁨, 음식 선물과 나눔을 절기의 내용으로 제시한다. 미슈나와 탈무드 시대에 이르러 에스더 두루마리 낭독, 가난한 이에게 주는 선물, 음식 선물, 특별한 식사의 구조가 더욱 분명해졌다.
지역에 따라 푸림의 모습도 달라졌다. 유럽에서는 가면극과 하만타셴이 발전하였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서로 다른 음식과 음악, 지역적 공연 전통이 형성되었다.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학교와 지역 공동체가 의상 행렬과 축제를 열지만, 종교적으로 푸림의 핵심은 여전히 메길라 낭독과 나눔에 있다.
푸림이 기억하는 구원
푸림의 서사는 전쟁의 승리만을 기념하지 않는다. 소수 공동체의 생존, 숨겨진 정체성의 공개, 권력자의 음모가 뒤집히는 과정, 그리고 위험 속에서도 서로를 돌본 공동체를 함께 기억한다.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은 오히려 일상의 정치와 인간의 결단 속에서 구원을 읽게 한다.
그래서 푸림은 엄숙한 회개만이 아니라 웃음과 음식, 의상과 선물로 기억을 이어 가는 절기이다. 에스더 두루마리를 읽고, 가난한 이에게 나누며, 공동체의 식탁을 마련하는 행위가 한데 모여 푸림의 의미를 이룬다. 위기의 기억은 세대를 거치며 기쁨과 연대의 실천으로 바뀌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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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더 읽을거리
- Michael V. Fox, Esther: A Commentary.
- Adele Berlin, The JPS Bible Commentary: 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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