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스커스 역사

다마스커스: 시간의 결을 품은 도시

1. 도입: 왜 다마스커스인가?

다마스커스(دمشق, Dimashq)는 인류 문명의 시원과 깊게 연결된 도시다. 수천 년 동안 지속적인 인류 거주가 이루어진 도시로, 그 오랜 역사는 단순히 고고학적 흥미를 넘어 오늘날에도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중추로 기능하고 있다.

‘다마스커스’라는 이름의 어원은 고대 아람어 Darmaśeq 또는 Dimashqa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어는 “피로 물들다” 또는 “물의 풍요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이 이름은 도시의 지형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다마스커스는 시리아 남서부의 비옥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안티레바논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바라다(Barada)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강은 주변의 황량한 사막 지대와는 대조적으로, 도시를 둘러싼 오아시스를 형성해 농업과 정착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다마스커스를 단지 정착지로 만든 것에 그치지 않았다. 고대부터 사막을 가로지르는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하며, 상인과 순례자, 군대와 사상가가 교차하는 문명의 경계선 역할을 수행했다.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연결하는 이 위치는 도시를 역사적으로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도시 중심부에는 고대 성곽과 함께 로마식 도로, 이슬람 초기의 모스크, 오스만 시대의 주택들이 겹겹이 남아 있다. 이 복합적인 유산은 다마스커스를 단순히 오래된 도시가 아닌, 시간을 관통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마스커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중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출발점이 된다.

2. 고대 다마스커스와 아람 시대

다마스커스의 역사는 기원전 3천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도시는 고대 근동의 문명 교차로에 위치하며, 이미 고대 이집트 문헌과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다마스커스가 역사적으로 뚜렷한 정치적 실체로 자리 잡은 시기는 기원전 12세기 무렵, 아람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아람은 셈족 계통의 민족으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에서 남하하여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아람-다마스커스’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 왕국은 기원전 10세기부터 8세기까지 번성하며, 당시 이스라엘 왕국 및 앗수르 제국과의 정치적 긴장과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성경에서는 ‘다마스쿠스’라는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며, 북이스라엘 왕국과 외교·군사적 연합 또는 대립의 주체로 묘사된다(예: 열왕기하 8장, 아람 왕 하사엘 관련 기록).

아람-다마스커스 왕국은 정치적 독립성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닌 세력으로,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고 이 언어는 훗날 서아시아 전역에서 상업과 외교의 주요 언어로 확산되었다. 이 점에서 다마스커스는 언어적·문화적 영향력을 널리 확산시킨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아람어는 이후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오랫동안 사용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일상에서 사용한 언어로도 알려져 있다.

기원전 732년, 앗수르 제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다마스커스를 정복하면서 아람 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만, 도시 자체는 앗수르와 바빌론, 이후 페르시아 제국 통치 아래에서도 그 존재감을 이어갔다. 아람 시대의 다마스커스는 단지 한 왕국의 수도라는 의미를 넘어서, 고대 근동 국제 정치의 핵심 플레이어로 기능하며, 문화·언어·종교의 흐름을 연결한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3.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의 다마스커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이후, 다마스커스는 그의 제국에 편입되며 헬레니즘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알렉산더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도시는 그리스식 행정 체계와 도시 건축 양식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 다마스커스는 폴리스(polis)로 조직되었고, 그리스어가 공식 언어로 쓰이기 시작하며 헬레니즘 문화가 시민 생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 시대의 다마스커스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다. 지중해와 내륙 아시아를 연결하는 대상로의 핵심 경유지로서, 다양한 상품과 사상이 오가는 열린 장이었다. 헬레니즘 시대 도시 특유의 시가지 정비, 공공 광장(아고라), 체육관(짐나시움), 극장 등도 다마스커스에 들어서며 도시의 외관과 시민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Pompeius)가 시리아 지역을 로마 제국에 병합하면서 다마스커스는 로마의 속주로 전환되었다. 로마 시대에 이 도시는 더 넓은 행정망 속에 통합되었고, 동방과 서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의 전략적 가치는 오히려 증대되었다. 특히 도로망 정비와 함께 도시는 구조적으로도 로마의 도시 모델을 따르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유산이 바로 다마스커스의 중심 도로였던 ‘스트라타 디오메데스(Strata Diomedes)’이다. 이 도로는 현재도 다마스커스 구시가지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로마 시대의 건축 유산으로는 유피터 신전, 아르쿠스 트리움(개선문), 공중 목욕탕, 수로시설 등이 있다. 특히 유피터 신전은 후에 기독교 교회, 그리고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되며 다마스커스 종교사의 중심 장소로 남게 된다.

이 시기 다마스커스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서의 색채를 띠게 되었고, 이후 비잔틴 제국 시대와 이슬람 시대에도 그 유산이 이어졌다. 로마 제국의 동방 전략과 경제 교류를 책임지는 도시로서, 다마스커스는 다시 한 번 그 중심성을 강화해 나갔다.

4. 비잔틴 시대와 기독교 도시 다마스커스

서기 4세기,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아가 국교로 삼으면서, 다마스커스는 헬레니즘-로마적 기반 위에 기독교적 색채를 더하게 되었다.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지배 아래, 이 도시는 새로운 종교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도시의 얼굴을 바꿔 나갔다. 이전까지 제우스나 유피터에게 바쳐졌던 신전들은 교회로 개조되었으며, 교회 지도자들은 시민 공동체의 문화와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다마스커스는 도시 전체가 신학적 상징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쳤다. 주요 성당들이 들어섰고, 주교좌가 세워졌으며,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 도시에 머무르며 신앙 여정을 준비하곤 했다. 이 시기에는 교회 회의(시노드)도 지역 단위에서 활발하게 열렸고, 시리아 지역의 고유한 기독교 전통인 시리아 정교와 그 문헌도 발전했다.

건축적으로도 변화가 뚜렷했다. 초기 로마식 기념비와 극장이 조용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 건물들이 차지했다. 대표적인 예가 유피터 신전을 개조해 만든 기독교 대성당으로, 이곳은 훗날 우마이야 모스크로 바뀌게 되는 상징적 장소였다. 이러한 장소 전환은 단순한 기능 변경이 아니라, 다마스커스가 지닌 종교적 연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드러내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다마스커스는 행정 도시로서의 기능은 약해졌지만, 종교적 중심 도시로서의 위상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여러 기독교 교단들이 공존하며 다채로운 신학과 전례 문화를 꽃피웠고, 그 안에서 시리아 기독교 문학과 순교 전승도 더욱 확산되었다.

무슬림들이 도시에 진입하기 직전까지 다마스커스는 시리아 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도시로 기능했다. 그 종교적 유산은 이후 이슬람 시대에도 흔적으로 남아, 도시의 다층적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었다.

5. 이슬람의 정복과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커스

서기 635년, 이슬람의 정복군이 다마스커스에 입성하면서 도시의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초기 무슬림 지휘관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의 지휘 아래 평화협정에 따라 도시는 큰 파괴 없이 넘어갔고, 이로 인해 다마스커스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정복된 대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다마스커스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로 도약하였다. 특히 661년, 우마이야 왕조가 수립되면서 다마스커스는 공식적인 이슬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아라비아 반도 너머로 뻗어나가는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다마스커스를 새로운 문명의 심장으로 발전시켰다. 정치·군사적 행정이 집중되었을 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제국의 위용을 반영하는 공간으로 재설계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우마이야 모스크다. 이 모스크는 이전의 기독교 대성당 자리 위에 세워졌으며, 로마-비잔틴 양식과 이슬람 건축이 조화를 이룬 첫 대형 모스크로 평가된다. 황금빛 모자이크와 정교한 기둥 장식은 초기 이슬람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다마스커스는 이 시기에 이슬람 교리와 법학, 과학, 의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발전하는 지식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우마이야 궁전, 시장, 정원, 목욕탕 등도 새롭게 조성되며 도시는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워졌다. 단지 행정 기능만 강화된 것이 아니라, 도시민의 삶 전체가 제국의 수도다운 품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교통과 통신 면에서도 전략적인 위치에 있던 다마스커스는 이슬람 세계의 동서 연결 지점이 되었다.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나아가 스페인까지 이어지는 무역과 사상의 흐름이 이 도시를 거쳐 갔다.

이처럼 다마스커스는 우마이야 시대를 통해 단순한 정복 도시에서 벗어나, 이슬람 문명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수도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아바스 왕조가 바그다드로 중심지를 옮기면서 수도의 지위는 사라졌지만, 다마스커스의 문화적 영향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6. 오스만 시대의 다마스커스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마멜룩 왕조를 무너뜨리고 다마스커스를 점령하면서, 도시는 새로운 제국의 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다마스커스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중요한 행정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다마스쿠스 주(Eyalet of Damascus)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 하에서 다마스커스는 메카와 메디나로 향하는 성지 순례길(하즈 루트)의 관문이 되었다. 매년 수천 명의 순례자가 이곳을 통과하며, 도시에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 마차 정비소, 시장, 수도시설 등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었다. 술탄은 매년 ‘메카 행렬’을 조직하고 이를 다마스커스에서 공식 출발하게 함으로써, 도시의 종교적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오스만 시대의 다마스커스는 건축적으로도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특히 술레이만 1세(법전 제정자)의 통치기에 다마스커스는 이슬람 도시로서의 품격을 다시 정비하였다. 유명한 탁리야 수피아나(Takiyya al-Suleimaniya) 건물은 그 대표적인 예로, 수피 신비주의자들을 위한 종교학교와 모스크, 그리고 순례객들을 위한 숙소가 함께 있는 복합 시설로 설계되었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정제된 건축미와 도시 관리 방식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 다마스커스는 단지 정치와 종교의 중심일 뿐 아니라, 공예, 직물, 향료, 무기 제작 등 수공업이 발달한 상업 도시로서의 위상도 유지했다. 특히 다마스커스 강철로 대표되는 무기 제조 기술은 유럽과 아시아의 상인들에게도 잘 알려졌으며, ‘다마스커스 칼’은 품질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실크와 면직물, 장식용 타일 등 다양한 공예품이 시리아 전역에서 모여들었고, 시장(수크)들은 제국 전역의 상품과 언어, 문화가 교차하는 장이 되었다.

한편, 오스만의 통치 하에서도 다마스커스는 여러 차례 전염병, 지진, 기근 등의 재난을 겪었고, 행정의 부패나 지역 총독의 자의적인 통치로 인해 민중의 불만이 누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다마스커스는 그 위상을 잃지 않고, 제국 내에서 정치·종교·상업의 중심 도시로서 기능을 유지하였다.

오스만 제국 말기, 19세기에는 유럽 열강의 간섭이 점차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다마스커스 역시 여러 개혁(탄지마트)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 인프라의 현대화, 교육기관의 개편, 철도와 통신망의 도입 등이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제국의 말기적 징후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7. 프랑스 위임통치와 현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고 시리아 지역은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20년, 프랑스는 시리아 전체를 점령하고 다마스커스를 위임통치령의 수도로 삼았다. 이 시기의 다마스커스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 곧 식민 행정과 직접 마주하며 복잡한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프랑스는 행정, 교육, 인프라 등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통제 체제를 도입했다. 특히, 1925년 다마스커스에서 발생한 시리아 대봉기(Great Syrian Revolt)는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민중의 격렬한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군은 도시를 폭격하며 진압했고,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와 역사적 유산이 훼손되었다. 이 시기는 다마스커스가 단지 정치 중심지인 것에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과 민족 저항의 심장부로 자리매김한 시기이기도 했다.

1946년,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고, 다마스커스는 독립 시리아의 공식 수도가 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다마스커스는 격동의 현대사를 헤쳐 나갔다. 군부 쿠데타, 바아스당의 집권, 아랍 사회주의 정책, 냉전기의 외교 변화 속에서 도시의 정체성도 함께 진화했다.

오늘날의 다마스커스는 행정과 정치, 종교와 전통이 중첩된 공간이다. 우마이야 모스크(Umayyad Mosque)는 이슬람 세계의 중요한 성소로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의 건축 유산은 구시가지(Old City) 곳곳에 살아 있다. 현대적 고층 건물과 정부 청사들이 도시 외곽으로 퍼지며 확장된 도시 구조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시리아 수도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시리아 내전의 여파는 다마스커스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도심 일부는 전투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도시 외곽과 주변 지역은 치열한 충돌의 현장이 되었고, 이는 도시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흔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마스커스는 여전히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서, 복구와 회복의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작성자: aetov.com | 원문 일부 출처: blog.naver.com/0216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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