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삼두정치와 유대의 정치 격동기
2차 삼두정치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우스(후일 아우구스투스), 레피두스에 의해 형성된 로마의 정치 연합입니다. 이 시기는 유대 땅에서도 엄청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하스모니아 왕조가 몰락하고 헤롯이 왕위에 오르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1. 안토니우스와 유대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자 동방 총독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유대 지역을 포함한 시리아, 아나톨리아, 이집트 등을 관할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해인 BC 44년에 집정관이 되었으며, 그 영향력은 유대의 헤롯 가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압한 직후, 힐카누스 2세는 헤롯, 파사엘과 함께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로마로부터 tetrach(분봉왕)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 BC 40년, 파르티아가 힐카누스의 정적 안티고누스와 연합해 예루살렘을 침공함. 파사엘은 자결, 힐카누스는 귀를 잘림(대제사장 자격 박탈).
- 헤롯은 로마로 가서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인의 왕 칭호를 받았고, 이후 로마-유대 연합군을 조직하여 예루살렘을 재탈환(B.C. 37).
- 이 과정에서 하스모니아 왕조는 역사 속으로 퇴장하였고, 헤롯이 유일한 통치자로 등극.
-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하스모니아 가문의 미리암과 결혼함.
2.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이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에 몰입하여 옥타비아와 결별하고 시리아, 여리고 등의 지역을 그녀에게 할양하였습니다. 이는 유대 지역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헤롯은 갈릴리와 유대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 놓였습니다.
- BC 33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에페소스로 이동. 헤롯은 이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고 이집트를 병합하라”는 서신을 보냄.
- BC 32년, 로마는 안토니우스의 권한을 박탈하고 이집트에 선전포고.
- BC 31년, 헤롯은 성전 북쪽에 안토니아 요새를 건설.
- 같은 해,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 후 자살, 클레오파트라도 자살.
3. 옥타비우스의 부상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후계자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로마 서방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로마의 주인공으로 떠오릅니다.
- 헤롯은 권력 이동을 감지하고 로도스 섬에서 옥타비우스를 찾아가 충성을 맹세.
- 옥타비우스는 헤롯을 다시 유대의 왕으로 인정하고, 사마리아와 해안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줌.
- 헤롯은 이에 감사하여 BC 30년 사마리아를 세바스티아(Sebaste)라 명명.
- BC 22년부터 12년간 가이사랴 항구 건설, BC 10년 완공. 카이사르를 기려 도시 이름을 붙임.
4. 레피두스의 몰락
- 1차 삼두정치가 사적 연합이었다면, 2차 삼두정치는 공적 합의에 기반한 체제였습니다.
- 레피두스는 시칠리아를 관할하였으나 정치 기반이 약했고, BC 31년 유배당함.
맺음말
2차 삼두정치는 로마 제국의 분할 통치 속에서 유대 지역이 어떻게 활용되고 변화해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헤롯의 정치적 유연성과 재빠른 판단은 유대 왕권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는 또한 하스모니아 왕조의 마지막이자 헤롯 왕조의 서막이 열리는 전환기였습니다.
참고문헌:
이경윤,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로마 제국의 역사, 삼양미디어
Peter Connolly, Living in the Time of Jesus of Nazareth, Steimatz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