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1차 삼두정치 시기의 유대 정치

폼페이우스와 예루살렘, 삼두정치 시기 유대의 정치

로마의 삼두정치(BC 60년경)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라는 세 인물에 의해 형성된 권력 연합입니다. 이 시기 유대 지역에서는 하스모니아 왕조의 혼란과 로마 제국의 개입이 겹쳐 정치적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래에 각 인물의 특징과 유대의 주요 정치 사건을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1차 삼두정치 인물 개요

  • 크라수스 –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BC 70년 집정관(경제 담당)을 지냄. 그러나 파르티아 원정 중 전사함.
  • 폼페이우스 – 에스파냐 반란 진압, BC 70년 집정관(군사 담당). 삼두정치 중 유대와 가장 밀접한 인물.
  • 카이사르 – 민중파 가문 출신. BC 59년 집정관(민중 담당). 갈리아 원정 등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독재자로 군림하다 암살당함.

유대 지역의 정치 흐름

  • BC 67년 – 힐카누스 2세가 하스모니아 왕으로 즉위.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테르와 가까운 관계.
  •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아 예루살렘을 공격.
  • BC 65년 –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가 예루살렘 공격에 가담.
  • BC 63년 –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가 각각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요청.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 자치 시대를 종식시킴.
  • 폼페이우스는 성전에 손상을 가하지는 않았으나, 유대 율법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 유대인의 분노를 삼.

폼페이우스의 군사 작전은 성전 북쪽에서 진행되었으며, 요세푸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공격하기 좋은 성전 북쪽에 진을 쳤다. 그러나 여기에도 거대한 바리스가 있었고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성전은 깊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Ant 14:60-61)

이 바리스는 후일 헤롯 대왕이 재건한 안토니아 요새의 전신이며, 그 방어적 위치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정권 재편과 로마의 영향

  •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압송되었고, 힐카누스는 대제사장으로 복귀.
  • 안티파테르가 유다의 행정관으로 임명됨.
  • 이후 카이사르의 등장은 안티파테르 가문에 더 큰 기회를 제공함.

카이사르와 유대의 재편

  • BC 47년 – 카이사르가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안티파테르의 군사지원을 기억해 유다의 통치권을 부여.
  • 안티파테르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고 영향력을 확장.
  • 안티파테르의 아들 파사엘은 예루살렘 총독, 헤롯은 갈릴리 총독에 임명됨.
  • 이두매아 출신 가문이 유대인의 통치권을 갖게 되자, 유대 내부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어남.

카이사르는 이후 종신 독재관으로 군림하며 율리우스력을 도입하였고, BC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를 포함한 암살자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다시 한번 유대 지역을 포함한 동방의 정세를 뒤흔들게 되었습니다.


요약

로마의 삼두정치와 그 인물들의 경쟁 속에서 유대는 점점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하스모니아 자치권은 축소되었으며, 안티파테르와 헤롯 가문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사건은 후일 헤롯 대왕 시대와 신약 성경 시대 배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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