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고대 세계의 경계에 선 도시
1. 트로이의 지정학적 위치와 지형적 조건
트로이(Troy)는 지중해 동부 해역과 아나톨리아 내륙을 연결하는 교차지점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지리적 조건과 해상·육상 통로의 결절성에 의해 문명사적 전략 거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현재 유적이 발굴된 히사르륵(Hisarlık) 언덕은 터키 공화국 마르마라 지역의 차나칼레(Çanakkale) 남서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서쪽으로는 에게해(Aegean Sea),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향하는 주요 교역로와 인접한다. 이러한 위치는 트로이를 고대 지중해 문명권과 서아시아 내륙을 잇는 정치적·경제적 중간지대로 부상시켰다.
히사르륵 언덕 자체는 해발 고도 약 30미터에 이르는 비교적 낮은 구릉지지만, 서쪽으로는 해협과 해안선, 북쪽으로는 풍부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어 지속 가능한 정착과 농업 기반의 도시 형성이 가능했다. 도시의 중심은 언덕 정상에 위치한 성채 구조(Akropolis)로, 방어력을 극대화한 위계적 구조를 형성하며, 주변의 평지에는 일반 주거지, 공방, 저장소 등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트로이가 군사적 방어성과 경제적 확장성을 동시에 고려한 계획 도시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트로이는 고대 교역망의 핵심 축을 구성하는 해상 항로와 육상 교역로가 만나는 접점에 위치하였다. 에게해에서 출발한 선박은 키클라데스 제도, 크레타, 로도스 등을 거쳐 트로이 앞바다에 도달하였으며, 이 항로는 흑해 방면으로 향하는 해협 진입로와 이어져 동서 간 해상 이동의 핵심 경유지로 기능하였다. 동시에 트로이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육상로는 아나톨리아 내륙 및 히타이트 제국 중심지(하투샤)로 연결되는 중앙 고원 무역 루트의 서단부로, 상업적 중개기지의 조건을 충족했다.
이와 같은 교차성은 트로이의 정치적 위상에도 반영되었다. 트로이는 독립된 도시국가로서 기능함과 동시에, 히타이트 제국의 종속적 외교 대상이자 에게 해양 세력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균형 외교를 시도하는 전략적 중간 권력으로 존재했다. 히타이트 문헌에서 등장하는 윌리오스(Wilusa)와의 동일성은 이러한 지정학적 함의를 반영하는 중요한 자료적 근거로 평가된다. 트로이의 위치는 그 자체로 주변 강대국들의 통상권, 영향력 투사, 해상 진입로 확보와 직결된 것이며, 이는 도시가 외적 침략과 내적 방어에 모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형적으로도 트로이는 내륙과 해안을 아우르는 복합 지형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서쪽으로는 마르마라해와 연결되는 다르다넬스 해협이 있으며, 해협을 건너면 유럽의 트라키아 지역이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아이다 산맥(Ida Mountains)에서 유입되는 하천이 농업 생산과 도시 생존 기반을 형성하였고, 남쪽으로는 평탄한 충적토 지대가 넓게 분포하여 도시 확장과 식량 자급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트로이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 정착과 도시 재건을 반복할 수 있는 지리적 안정성의 기반이었으며, 트로이 I부터 IX에 이르는 수천 년간의 도시 중첩 구조를 설명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트로이의 지정학적 위치는 에게해 문명권과 아나톨리아 내륙 간의 전략적 경계에 놓인 문명 간의 교섭 지대였으며, 지형적 조건은 지속 가능한 정착, 방어, 교역, 문화 형성의 복합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 도시는 고대 세계에서 군사·경제·외교·문화가 맞물리는 접경 도시(Border City)로 기능했으며, 트로이 전쟁이라는 신화적 서사조차도 이러한 지정학적 긴장의 반영일 수 있다. 따라서 트로이는 고대 지중해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지형 그 자체가 서사의 일부가 되는 예외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2. 트로이 도시의 기원과 정착 시기
트로이(Troy)의 도시사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명 전개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다층적이고 장기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터키 공화국 차나칼레 남서부의 히사르륵(Hisarlık) 언덕에서 발굴된 유적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로마 제국 시기까지 약 3천 년 이상 지속된 도시의 반복적 축조와 붕괴, 재건의 과정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다층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구조는 트로이 도시의 기원을 신화나 문헌의 서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물리적 증거를 통해 문명 형성과 도시 진화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을 트로이 I부터 IX까지로 구분하며, 각 층위는 특정한 시기와 문화 양식을 반영한다. 가장 하층에 해당하는 트로이 I층(기원전 약 3000–2600년)은 청동기 초기 문화로, 원형 또는 타원형 주거지, 간단한 방어벽, 수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트로이는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한 자급자족형 정착지로 평가되며, 지역 내 작은 권력 중심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후 트로이 II~V층(기원전 약 2600–1900년)에 해당하는 중간 단계는 도시화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트로이 II층에서 발견된 이중 성벽, 기단 구조, 대형 저장고와 금속 유물은 고도의 사회 조직화와 계층 분화, 그리고 상징적 중심지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트로이 II층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주장한 유물의 출토층으로 알려졌으며, 비록 연대 배정과 유물의 소유자에 대한 학문적 이견은 존재하지만, 이 시기가 도시의 외형적 확장과 권력 집중이 본격화되는 전환기였다는 해석에는 학계의 공감대가 존재한다.
고대 트로이의 정점은 트로이 VI층(기원전 약 1700–1250년)과 VIIa층(기원전 약 1250–1190년)에서 나타난다. 트로이 VI층은 도시 전체가 계획적으로 축조된 방어벽, 다각형 석조 주거지, 정형화된 도로 체계 등을 갖추고 있어, 지역 중심 도시 혹은 해안 교역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확립한 시기로 이해된다. 이 시기의 유적은 해상 무역에 적합한 자연항을 배경으로, 에게해와 아나톨리아를 연결하는 경제·정치적 허브로 기능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뒤이은 트로이 VIIa층은 VI층의 구조를 대부분 계승하면서도, 급작스러운 파괴 흔적, 불탄 흔적, 두꺼운 잔해층 등이 발견되며,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시기를 트로이 전쟁 서사의 역사적 반영 가능성이 있는 시점으로 본다. 특히 이 시기의 주거지는 기존 구조에 비해 간소화되고 밀집된 배치 형태를 보이는데, 이는 전쟁기 도시의 피난 형태, 혹은 긴장 상태 속에서의 도시 재구성을 시사하는 자료로 해석된다.
이후 트로이는 트로이 VIIbVIII층(기원전 약 1100300년)을 거치며 점차 쇠퇴와 변화를 겪는다. 트로이 VIII층은 그리스 세계와의 통합 속에서 헬레니즘적 도시 구조를 반영하고 있으며, 기원전 1세기경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하에 재건된 트로이 IX층(일리움 노붐, Ilium Novum)은 로마화된 도시 형태와 극장, 시장, 신전 등 정형화된 제국 도시 구조를 갖추게 된다. 이는 트로이가 여전히 고대 세계에서 신화적 기억과 정치적 상징이 결합된 공간으로 존속하였음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트로이 도시의 기원과 전개는 청동기 시대 초기의 농경 정착지로부터 에게해 동부의 교역 중심지, 그리고 헬레니즘·로마 제국기까지 이어지는 다층적 도시 진화를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이 도시의 시기별 변화는 단순한 건축물의 중첩이 아니라, 지속과 붕괴, 외압과 재건, 내부 조직과 외부 연계가 반복된 문명사적 흐름의 물리적 퇴적물로 볼 수 있으며, 그 자체로 고대 도시의 시간성과 공간성이 응축된 현장이라 할 수 있다.
3. 히타이트 제국과의 외교 관계
트로이의 국제적 위상과 정체성은 고대 아나톨리아의 패권국 히타이트 제국(Hittite Empire)과의 외교적 연계 속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특히 히타이트의 외교 문서 및 왕실 서신에서 언급되는 ‘윌리오사(Wilusa)’라는 지명이 트로이와 동일한 도시일 가능성이 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인정되면서, 트로이는 더 이상 신화적 고립 도시가 아니라 아나톨리아 국제 질서 내 정치적 행위자로서 그려지고 있다.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2세기 사이 아나톨리아 내륙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제국으로, 중앙 수도 하투샤(Hattusa)를 거점으로 에게해 연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과도 외교·군사적 관계를 맺었다. 히타이트 왕실 문서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기원전 13세기 후반 무르실리 2세(Mursili II)와 알락산두(Alaksandu) 간의 평화 조약으로, 이 조약은 윌리오사(Wilusa)의 통치자인 알락산두가 히타이트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종속적 외교 관계를 수립한 사건을 담고 있다.
이 조약문에서 알락산두는 ‘우리 형제 중의 하나’로 불리며, 히타이트 황실과의 일정한 친분관계를 통해 동맹을 맺은 인물로 묘사된다. 이는 윌리오사가 완전한 종속 국가가 아니라, 자율성을 보장받는 반독립적 도시국가의 외교 형식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히타이트는 윌리오사의 지위를 군사적 점령이 아닌 외교적 협약을 통해 관리하려 하였고, 이는 트로이가 위치한 지점의 전략적 민감성과 지역 세력 간 균형 외교의 필요성을 반영한다.
또한 히타이트 기록에는 ‘아히야와(Ahhiyawa)’라는 집단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는데, 이 명칭은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미케네 문명 또는 에게해 세계의 그리스계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히타이트는 아히야와와의 외교·군사 충돌을 언급하면서, 윌리오사가 이들 사이에서 외교적 중재 대상 또는 분쟁 지역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트로이는 히타이트와 아히야와 사이에서 영향권 경쟁이 벌어지는 접경지대로서 기능하였으며, 이는 이후 서사적 트로이 전쟁의 정치적 배경을 제공할 수 있는 역사적 전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히타이트의 왕실 문서인 ‘타와갈라와(Tawagalawa) 서신’에서는 윌리오사에 대한 긴장, 미케네 측의 개입 가능성, 분쟁의 해결을 위한 외교적 절차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이 고립된 도시들로 구성된 공간이 아니라, 제국 간 경계 협상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동적 질서의 일환이었음을 방증한다. 따라서 트로이와 히타이트의 관계는 피지배와 지배라는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중간 세력 간의 정치적 생존 전략과 외교적 기민성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외교 기록의 존재는 트로이를 단지 신화적 함락 도시로 보는 해석을 뛰어넘어, 실제 국제 외교 질서에 포함된 정체성 있는 도시국가로 재평가하는 데 핵심적인 기초 자료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트로이가 히타이트 제국과 맺은 외교적 유연성은 동방의 제국 질서와 서방의 해양 세력 사이에서 중재자이자 자율적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결론적으로 트로이는 히타이트와의 관계 속에서 종속과 독립, 외압과 외교, 갈등과 조정이 교차하는 외교사의 전형을 보여주며, 이 도시가 지닌 전략적 위치와 국제적 상호작용은 고대 지중해 국제 질서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조명하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4. 트로이인의 신화·종교·사상
트로이 문명의 정신적 기반을 구성하는 신화와 종교, 사상은 유적지에 남겨진 물리적 흔적과 주변 문화권과의 교차적 해석을 통해 복원 가능한 층위로 남아 있다. 트로이 자체는 독자적인 문헌 전통을 남기지 않았으나, 유적지에서 발견된 신전 유구, 제의적 유물, 상징물, 그리고 인근 문명과의 신화적 상호작용을 통해 트로이인의 정신세계와 존재 인식을 일정 부분 추론할 수 있다. 이들의 사상은 단일 교리나 정교한 신학 체계라기보다는, 자연 환경, 공동체 질서, 신성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인식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트로이 유적 내에서는 일정한 공간이 종교적 제의 장소로 기능했음을 시사하는 구조들이 확인된다. 특히 성벽 내부 고지대에는 일반 거주지와 구분되는 독립된 공간이 존재하며, 이곳에서는 주기적인 제사, 축제, 공공 의례가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출토된 토우, 제단 흔적, 의식용 도기 등은 집단적 신성 개념의 존재와 종교적 의례 행위를 암시한다. 이는 트로이 사회가 자연과 신, 인간과 공동체의 조화를 중심 개념으로 구성된 세계관을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신화적 서사에서는 트로이가 고대 그리스 세계와의 전쟁 서사 속에서 주요 신들의 지리적 개입 무대로 제시된다. 『일리아스』에서 아폴론은 트로이의 편에 서며, 이로 인해 트로이는 고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아폴론 숭배가 활성화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트로이와 관련된 유적지 인근에는 아르테미스, 시벨레(Cybele), 제우스 등의 신격과 연관된 제단이 존재하는데, 이는 트로이가 헬레니즘 이전에도 복수의 신격을 수용한 개방적 종교 공간이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히 시벨레와 같은 대지의 여신은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숭배된 신격으로, 트로이의 여성적 창조력과 생명성 중심 사상과 연결될 수 있다.
트로이 사회의 가치관은 『일리아스』 속 트로이 인물들의 성격 묘사에서도 일정하게 드러난다. 헥토르(Hector)는 가족에 대한 책임, 공동체의 수호, 명예로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통해 개인적 영광보다 공적 헌신을 중시하는 윤리 의식을 대표한다. 트로이 측 인물들은 그리스 측 영웅들보다 상대적으로 가정, 질서, 절제, 운명 수용의 태도를 더 강하게 드러내며, 이는 트로이 사회가 가진 내면적 철학의 단초로 해석될 수 있다. 전쟁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공동체의 지속성과 정당한 통치를 강조하는 정서가 트로이인의 사상적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 트로이는 도시 중심부에 신전을 건립하고, 통치자의 권위와 신성의 관계를 구조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트로이가 고대 근동의 왕권신정적 문화와 에게해 다신교적 세계관 사이에서 종교와 권력, 신성과 정치의 복합적 구조를 형성한 접경 도시였음을 시사한다. 제사장은 정치지도자와 동일 인물이거나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제의 행위는 공동체 결속과 통치 정당성의 중심 장치로 기능했을 것이다.
결국 트로이의 신화·종교·사상은 주변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복합체적 성격을 지닌다. 트로이는 특정 신격에 독점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복수의 상징과 내러티브, 환경과 공동체 경험이 결합된 신성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이는 트로이가 지역 문명권의 사상적 흐름을 흡수·재해석하며 자율적 질서를 형성했던 고대 도시국가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신세계는 물리적 유적 못지않게 트로이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요소로 작용한다.
5. 해상권과 육상권의 교차성
트로이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해상과 육상의 주요 교역로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형성·발전하였다. 이 도시는 에게해 동북 해안과 아나톨리아 내륙의 연결점에 위치하며, 특히 다르다넬스 해협과 가까운 위치는 트로이를 고대 해양 통로와 내륙 교통망의 경유지로 기능하게 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트로이의 정치적 위상뿐 아니라 경제적 기반, 외교 전략, 군사 방어 체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으며, 도시의 지속성과 긴장성을 동시에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였다.
해상권의 측면에서 트로이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가장 좁은 수로 입구에 인접해 있어, 선박들이 흑해나 동지중해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전략적 해역의 관문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 위치는 항로의 안전과 효율을 확보하려는 다양한 세력들에게 트로이를 항구적 중개지이자 항로 감시 지점으로 간주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도시의 해양 통제력이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특히 트로이 앞바다에는 자연 항만으로 활용 가능한 완만한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어, 상선과 전함 모두 정박과 교역이 용이한 환경을 제공했다. 고고학적 자료는 트로이의 일부 성벽이 바다로 직접 연결되거나 항구 관리와 연계된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트로이의 해양 전략은 무역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 도시는 크레타, 키클라데스 제도, 로도스, 키프로스 등 에게해 해양 네트워크와 연계된 경유지였으며, 청동기 시대의 주요 상업품인 금속, 도자기, 직물, 염료 등의 교역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트로이 유적에서 출토된 미케네 양식 도자기, 근동계 장신구, 시리아산 물품 등은 트로이가 다양한 문화권과 연결된 해양 교역의 허브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이다.
반면, 육상권의 측면에서 트로이는 아나톨리아 내륙과 연결된 서부 교역로의 종착지 또는 출발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도시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내륙로는 히타이트 제국 중심부인 하투샤(Hattusa)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고원 도시들과 연결되었으며, 이 노선은 주로 금속류, 가축, 농산물, 피혁, 무기 등의 교역에 활용되었다. 트로이는 이러한 내륙로의 해양 접속점으로 기능하며, 지중해 세계와 서아시아 내륙 사이의 경제적 중개지로 자리잡았다.
이 두 영역의 교차성은 트로이를 외부 세력의 충돌 지점으로 만들었다. 에게해 연안의 해양 세력(미케네, 아히야와 등)과 아나톨리아 내륙의 대제국(히타이트) 사이에서 트로이는 항로 확보, 무역로 장악, 영향력 투사를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곧 도시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지속적으로 위협받는 구조적 환경을 의미하며, 트로이의 외교적 유연성, 방어체계의 고도화, 정치적 중립 유지 등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이유를 제공하였다.
트로이의 해상권과 육상권은 공간적 중첩만이 아니라, 시간적 지속성과 문화적 융합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이 도시는 에게-아나톨리아-흑해 문명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수천 년에 걸쳐 인적·물적 교류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며, 정체성을 조정해 온 문화적 변환의 현장이었다. 이러한 위치적 조건은 트로이를 반복적으로 성장시킨 동시에, 갈등의 전선으로 만들었고, 결국 신화적 전쟁의 서사가 생성된 구조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트로이의 경제 기반과 생산체계
트로이의 지속성과 도시 발전의 핵심 동력은 지정학적 위치에 기반한 교역 중심 경제 구조와 지역적 자원 활용을 결합한 복합적 생산체계에 있었다. 이 도시는 에게해와 아나톨리아 내륙을 연결하는 통상로의 요충지에 위치함으로써, 수동적인 경유지를 넘어 경제적 중계기지이자 자율적 생산단위로 기능하였다. 트로이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고고학적 증거들은 해당 도시가 자급자족형 농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해상 교역과 공예품 생산, 자원 가공 등을 통한 다층적 경제 구조를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곡물과 축산을 중심으로 한 농업 기반의 안정성이다. 트로이가 위치한 히사르륵 언덕 주변은 고대부터 충적토와 하천 유역이 발달한 지역으로, 밀, 보리, 렌즈콩 등의 곡물이 재배되었고, 유물 분석 결과 염소, 양, 소와 같은 가축 사육의 흔적도 명확히 드러난다. 도시 내에서 확인된 저장소 구조와 곡물 보관용 커다란 항아리(pithoi)는 식량의 장기 보존과 공동 분배를 위한 조직화된 경제 행위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는 트로이가 도시 규모를 유지하고 장기적 방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식량 기반 자립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트로이 경제의 또 다른 축은 공예품 및 금속 가공 기술이다. 특히 트로이 II층과 VI층에서 발견된 도기류는 일정한 패턴과 질감을 유지하며 생산된 것으로, 도자기 생산의 전문화와 지역 내 소비·외부 유통을 위한 표준화 체계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청동기 시대 특유의 금속 공예 기술 역시 주목할 만하다. 청동 도검, 장신구, 연모 등은 현장에서 다량 출토되며, 금속 원료의 수입과 현지 제작이 병행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특히 트로이 II층에서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견한 ‘프리아모스의 보물’은 장신구, 컵, 귀걸이 등 금속제품의 고급화와 기술적 숙련도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남아 있다.
트로이는 또한 교역 중심 도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미케네식 도자기, 시리아계 유리 제품, 키클라데스 양식의 석기 등은 외부 문명과의 활발한 교류를 증명한다. 특히 트로이는 해상 교역의 허브로 기능하며, 중동 및 에게해 연안의 고급 물품이 내륙으로 이동하는 경유지였고, 동시에 내륙 생산품이 외부로 유출되는 출발지였다. 이처럼 교역의 양방향 흐름은 트로이가 통로의 기능을 넘어 상품과 정보의 분배 중심지로서의 구조를 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역 구조는 단순한 상품 이동에 그치지 않고, 경제권력의 집중과 사회 조직화의 근거로 이어졌다. 저장소의 분포, 유적 내 공방의 배치, 도로망의 연결 방식 등은 경제 활동이 도시 구조 내 주요 기능으로 통합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트로이가 경제적으로 단순한 생산 공동체를 넘어서, 계획적 생산과 분배, 관리 체계를 갖춘 고대 도시국가의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트로이의 경제는 농업 기반 자립성과 공예 전문화, 해상·육상 교역의 복합성, 도시 구조 내 생산기능의 통합이라는 요소들이 융합된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경제 구조는 트로이의 지속적인 성장과 자율성 유지의 핵심 기반이 되었으며, 동시에 외부 세력에 의해 도시가 전략적으로 주목받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트로이는 물리적 요새를 넘어, 경제적 가치와 유통망 장악력을 통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 도시국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7. 트로이의 계층 구조와 사회 조직
트로이의 사회 구조는 정치·경제·종교가 융합된 고대 도시국가 특유의 위계 질서를 반영하고 있으며, 유적 내 건축 배치, 물자 분포, 무덤 구조, 유물의 양과 질을 통해 복합적인 계층 분화와 사회 조직의 실체가 일정 부분 재구성 가능하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트로이의 도시 구조는 무작위적 확장보다는 통치권 중심의 계획적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이는 특정 집단이 도시 내 공간 사용과 자원 분배에서 우선적 권한을 행사했음을 시사한다.
트로이의 중심부에는 성채(Akropolis)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에는 고위 통치자 및 귀족 계층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대형 석조 주거지, 공공 회합 공간, 종교 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고지대 공간은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하며,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한 점에서 정치적 지휘권과 물리적 공간 지배가 결합된 구조임을 보여준다. 이는 고대 근동 및 에게해 도시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엘리트 계층의 고지 거주 전통과도 일치한다.
중심 성채 외곽에는 일반 주거지, 소규모 작업장, 저장고, 공동 도로망이 배치되어 있으며, 주거 구조는 규모와 자재, 배치 방식에서 명확한 위계 차이를 보인다. 일부 구역은 넓은 마당을 가진 독립된 구조로 구성된 반면, 다른 구역은 밀집도 높은 다세대 주거 형태를 보여주며, 이는 사회 계층 간의 거주 환경 차이를 반영하는 지표로 해석된다. 이러한 공간 배치는 트로이 사회가 경제적, 정치적 위계에 따라 내부 조직화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며, 도시 전체가 단일 집단의 생존 공동체가 아닌, 복수의 신분·역할이 공존하는 복합 사회 체계였음을 드러낸다.
트로이의 사회 조직은 군사, 종교, 행정 기능의 분화에 기반하여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벽 내부 고지대의 건축물 중 일부는 제사 혹은 통치 의례에 사용된 구조로 추정되며, 이는 종교적 권위와 정치 권력이 결합된 신정형 통치 구조(theocratic kingship)의 존재를 시사한다. 또한 도시의 외곽 방어선, 관문, 주출입 도로 등을 관리하기 위한 군사 조직 및 감독 체계도 병존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트로이는 단순한 방어적 요새가 아닌, 행정과 통치가 통합된 권력 중심체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의 역할 또한 다양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귀족 및 통치 계층 외에도, 농경과 축산에 종사한 하층민, 금속과 도기를 제작한 장인 계층, 제사와 제의에 참여한 종교 집단 등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도시 내 노동 분업과 역할 기반 질서가 구조적으로 정착되어 있었음을 반영한다. 일부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 도기, 무기 등의 편차는 개인의 신분 차이가 사후 표현에서도 지속적으로 재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증거로 작용한다.
트로이의 사회 조직은 폐쇄적 질서보다는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조정된 열린 구조였다. 히타이트나 미케네 등 외부 세력과의 외교 및 통상 관계는 트로이 내 사회 계층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외부 유입 세력의 통합 혹은 분리 여부, 혼인 정책, 전쟁 포로의 활용 등은 사회 통합과 권력 집중의 다층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트로이의 계층 구조는 지리·건축·물질문화의 분포 속에 명확히 반영된 위계적 사회였으며, 정치·종교·경제 기능의 통합과 공간적 분절 구조를 바탕으로 질서화된 도시 국가적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는 트로이의 안정성과 방어력뿐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과 대외 경쟁력을 구성하는 핵심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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