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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오케 논쟁
작성자: aetov.com | 원문 일부 출처: blog.naver.com/0216young
1. ‘Filioque’의 어원과 의미
‘Filioque’는 라틴어 단어로,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단어는 Filius (아들)와 que (그리고)를 결합한 형태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는 문장에 덧붙여져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표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조 원문에 없던 이 문구가 라틴 서방 교회에서 삽입되었고, 그로 인해 동방 교회와의 갈등이 촉발되었습니다. 단어 하나이지만, 이 표현이 삼위일체 이해의 방식, 교회 권위, 신조 수정 문제 등 복합적인 갈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필리오케의 첫 등장
필리오케가 공식적으로 처음 신조에 삽입된 시점은 589년 스페인 톨레도에서 열린 제3차 톨레도 공의회였습니다.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에서 개종한 서고트족의 개종을 선언하면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한다”는 구절을 포함시켰습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이 문구는 서방 교회 내에서 점진적으로 확산되었고, 프랑크 왕국 및 카롤루스 제국 시기에 공식 전례와 신조의 일부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이러한 변경이 보편 공의회의 합의 없이 이루어진 점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3. 신학적 핵심: 성령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논쟁의 중심에는 삼위일체 이해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서방 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로부터 발출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상 하나이며, 성령의 출처 역시 공동이라는 관점입니다.
반면 동방 교회는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성부는 삼위일체 안에서 유일한 근원이며, 성령은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지만, 출처는 성부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동방 교회는 필리오케가 성부의 독자적 지위를 훼손하고, 삼위일체 내 위계 질서를 왜곡한다고 보았습니다.
4. 교회 권위와 정치적 쟁점
필리오케 삽입은 신학의 문제의 범주를 넘어서서 ‘누가 신조를 수정할 권한을 가지는가’라는 권위 구조의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서방 교회는 로마 교황의 권위 아래서 신조를 확장해 나간 반면, 동방 교회는 보편 공의회의 합의 없이는 신조를 변경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필리오케 논쟁은 곧 교황권 논쟁으로 연결되었으며, “로마가 교회 전체의 수장이며 교리를 최종 결정할 권한이 있는가?”라는 문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는 이후의 동서 교회 분열(1054년)을 야기하는 결정적 뇌관이 됩니다.
5. 1054년의 사건: 논쟁이 분열로 번지다
1054년, 교황 레오 9세는 움베르토 추기경을 특사로 삼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였습니다. 당시 동방 교회 총대주교였던 미카엘 키루라리우스는 서방 전례의 여러 요소와 함께 필리오케 사용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움베르토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제단에 교황의 파문장을 올려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미카엘 총대주교는 교황과 그 사절단을 반대로 파문하며 응수하였고, 동서 교회는 공식적인 단절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건은 ‘상호 파문’이라고 불리며, 이후 천 년에 걸친 교회의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6. 현대의 평가와 일치 시도
20세기 후반 이후, 가톨릭과 정교회는 필리오케 논쟁에 대해 보다 유연한 이해를 시도해 왔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양측의 표현 방식이 동일한 진리를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제시합니다.
1995년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은 공동 문서를 통해, 성령이 아버지를 유일한 근원으로 하면서도 아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점에서 일정한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조에서 필리오케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정교회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