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기독교 카테고리에 속해 있습니다.
제8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870): 포티우스 논쟁과 교황권의 재정립
작성자: aetov.com | 원문 일부 출처: blog.naver.com/0216young
1. 시대적 배경: 동방과 서방의 긴장과 교권 충돌
제8차 세계 공의회로 간주되는 869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동서 교회의 긴장이 극단으로 치달은 가운데 열린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우스의 임명을 둘러싼 분쟁을 중심으로, 교황권과 황제권, 동방과 서방의 교회 이해 차이가 충돌한 대표적 사건입니다.
동방 교회(특히 비잔티움)는 제국의 황제가 교회 행정의 궁극적 권위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황제는 총대주교 임명에도 결정적 영향력을 미쳤으며, 교회와 국가가 긴밀히 연결된 구조 속에서 자율성과 신학적 전통을 중시했습니다. 반면 서방 교회는 교황이 보편 교회의 수장이며, 로마 사도좌는 황제 위의 영적 권위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이후 더욱 강화된 입장이었고, 당시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교황권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권 해석의 차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을 둘러싼 갈등에서 폭발하게 됩니다. 이전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는 황제 바실리우스 1세에 의해 사임하게 되었고, 대신 세속 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포티우스가 황제의 지명으로 급작스럽게 임명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서방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정통성과 성사적 권위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교황은 이를 즉시 무효로 규정하고 포티우스를 파문하게 됩니다.
2. 포티우스 사건의 전개
포티우스는 지적 역량이 탁월하고, 외교 및 행정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그나티우스가 강제 사임한 후, 5일 만에 세례를 받고 신속히 총대주교로 서임되었습니다. 이러한 임명 과정은 정통 교부 전통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많았고, 무엇보다 교황청과 사전 협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서방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863년 시노드를 통해 포티우스를 파문하였고,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이그나티우스를 복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포티우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867년 동방 교회 시노드에서 교황 니콜라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반격했습니다.
이후 황제 바실리우스 1세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이그나티우스를 복직시키고, 서방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이로써 제8차 공의회는 포티우스를 공식적으로 정죄하고 교황권의 우위를 재확인하는 장으로 전개됩니다.
3. 주요 인물
- 니콜라우스 1세 교황: 로마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며 동방 교회에 강경한 입장을 취함
- 포티우스 총대주교: 동방의 자율성과 신학적 정체성을 대표하며, 교황 중심주의에 반대함
- 이그나티우스: 총대주교직에서 축출되었다가 복직됨. 인격과 경건성에서 많은 지지를 받음
- 바실리우스 1세 황제: 제국의 정치 안정을 위해 교회 문제에 개입하고 공의회를 소집함
4. 공의회의 경과
공의회는 869년부터 이듬해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었으며, 주로 서방의 교황 대리단과 황제의 측근들이 주도했습니다. 동방 교회의 많은 주교들은 포티우스 지지자들이었기에 불참하거나 배제되었습니다.
공의회는 포티우스의 임명 절차가 불법적이며, 이그나티우스가 정통 총대주교임을 선언했습니다. 또한 포티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와 관련된 사제직도 모두 무효로 돌렸습니다. 동시에 교황의 최종 권위가 모든 교회 위에 있으며, 교황의 승인 없이 이뤄지는 교회 인사는 무효라는 선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5. 공의회의 선언과 결정
- 포티우스는 정통성이 없는 이단자로 규정되며 총대주교직에서 추방됨
- 이그나티우스는 총대주교로 복권됨
- 교황의 승인은 교회 인사 결정에 필수이며, 보편 교회의 수장은 로마 교황임을 재확인
- 포티우스가 집전한 성례, 서품, 문서 등은 모두 무효로 간주됨
이 결정은 동방 교회 내부에 큰 반발을 일으켰고, 이후 포티우스가 다시 복권되면서 실제로 이 공의회는 동방 정교회에서는 정통 공의회로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6. 신학 및 정치적 의미
신학적으로 이 회의는 직접적인 교리 논쟁보다는, 교회 조직과 권위 구조에 대한 해석 차이를 명확히 드러낸 사례입니다. 동방 교회는 각 지역 교회의 자율성을 중시했으며, 교황도 “수위 primus inter pares(동등한 가운데 첫째)”로 인식했습니다. 반면 서방은 교황을 보편 교회의 유일한 최종 권위자로 보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교황권이 황제권 위로 상승하는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교회 내 사안에서 로마의 독립성과 중심성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7. 교회사에 끼친 영향
이 공의회의 결정은 교황권의 우위를 공식 선언했다는 점에서 서방 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이 회의를 정통 공의회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후 879년 포티우스 복권과 함께 이 회의 자체가 무효화됩니다.
결과적으로 제8차 공의회는 동서 교회가 서로 다른 정통의 기준을 세우기 시작한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고, 이는 1054년 동서 교회 분열(Great Schism)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티우스는 복권 이후에도 동서 교회의 차이를 해소하려 노력했으나, 그의 저작에서는 이미 교황권에 대한 체계적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포티우스 분열’로 불리는 사건은 이후 동방 정교회가 로마 교황청의 권위와 중앙집중화에 대한 저항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은 이 공의회를 제8차 공의회로 인정하며, 동방 정교회는 이를 무효로 간주하고 879년 포티우스 회복 공의회를 진정한 제8차 공의회로 봅니다. 이처럼 동서 교회는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정통성을 고백하게 되었으며, 이는 교회사 전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구조적 균열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