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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 두 의지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을 밝히다
작성자: aetov.com | 원문 일부 출처: blog.naver.com/0216young
1. 시대적 배경: 기독론 논쟁의 마지막 격류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680년부터 681년까지 약 11개월 동안 진행된 중요한 회의입니다. 이전의 공의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의지에 대한 문제로 논쟁이 확장되었습니다.
회의는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의 주도 아래 소집되었습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외부의 아랍 제국 압박과 내부의 신학적 혼란에 직면해 있었으며, 황제는 교회의 통일과 교리 명확화를 위해 이 회의를 요청했습니다.
2. 배경 교리: 단일의지론과의 충돌
논쟁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의지(monothelitism)가 있었는가, 아니면 두 개의 의지(dyothelitism)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단일의지론은 예수께서 신성과 인성을 지니셨더라도 결국 하나의 의지만 가졌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교회의 분열을 완화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포함된 주장이었습니다.
반면 두 의지론은 예수의 두 본성이 각각의 고유한 의지를 지니며, 그 의지들이 충돌 없이 조화롭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더욱 분명히 인정하며, 신성과 인성의 온전성을 동시에 보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3. 주요 인물들
- 콘스탄티누스 4세: 공의회를 소집한 황제로, 종교 통합과 신학 정리를 주도했습니다.
- 교황 아가토: 서방 교회의 대표로, 명확한 두 의지론을 서신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 예루살렘의 소프로니우스: 단일의지론에 가장 강력히 반대했던 인물이며, 이 공의회 이전에 이미 의지론 논쟁을 제기했습니다.
- 막시무스 고백자: 두 의지론의 핵심 신학자로, 박해를 받아 손과 혀를 잘렸으나 그의 사상이 이후 공의회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4. 공의회의 전개와 결정
공의회는 동서방 교회 대표단이 참여한 가운데 다수의 신학 문헌을 검토하며 진행되었습니다. 서방에서 온 대표들은 교황 아가토의 서신을 근거로 예수 안에 두 개의 자연적 의지가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교리적 결정을 내립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뿐 아니라, 각 본성에 따른 두 개의 자연적 의지를 지니신다.
- 두 의지는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의지는 신적 의지에 완전하게 순종한다.
- 단일의지론은 이단으로 규정되며, 관련 인물들(세르기우스, 피루스, 파울루스 등)은 모두 이단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 결정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지키고, 교회가 고백해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 사이의 조화를 명확히 한 신학적 성과였습니다.
5. 칼케돈 공의회와의 차이점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존재한다는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두 본성뿐 아니라, 각각의 본성이 따로 작용하는 자연적 의지를 지닌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의 본성을 모두 보유하면서, 인격적 차원에서 독립적인 작용 능력과 의지를 유지한 존재로 고백됩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정교한 균형을 보여주는 결정이었습니다.
6. 교회사에서의 위치와 영향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기독론 논쟁의 마지막 고비를 정리하고, 이후의 교리 전개에 기준점을 제공한 중요한 회의입니다. 이후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모두 이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며, 개신교 신조의 상당 부분에도 그 영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이 공의회는 동서 교회의 협력이 최종적으로 확인된 마지막 시기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이전까지, 이 공의회의 교리는 보편적인 정통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