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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차. 포티우스 복권 공의회(879년)
작성자: aetov.com | 원문 일부 출처: blog.naver.com/0216young
1. 시대적 배경: 869년 공의회 이후의 교회 내 혼란
869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포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총대주교직에서 파문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는 동방 교회 내부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교회 구성원 상당수는 포티우스가야말로 진정한 정통 신학자이자 행정가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포티우스는 추방된 후에도 교회 안팎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877년 이그나티우스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여론과 주교단은 그의 복권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바실리우스 1세 역시 제국의 안정과 교회의 단합을 위해 포티우스의 복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2. 포티우스의 복귀 과정
이그나티우스의 사망은 공의회의 결정을 사실상 무효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고, 바실리우스 황제는 이전 회의의 결정이 정치적 판단에 기반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에 따라 878년 포티우스를 다시 총대주교로 지명하였으며, 879년 정식 공의회를 통해 그의 복귀를 공표하고 교회 내 질서를 재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회의는 황제와 동방 교회 전체의 주도 아래 소집되었으며, 서방 교회의 대표자들, 특히 교황 요한 8세의 사절단도 참여하게 됩니다.
3. 주요 인물
- 포티우스 총대주교: 복권의 중심 인물로, 동방 신학과 전통의 수호자
- 바실리우스 1세 황제: 제국 내 종교 통합과 교회 안정화를 위한 전략적 조율자
- 교황 요한 8세: 전임 교황 니콜라우스 1세와는 달리, 보다 유화적인 태도로 회의에 참여
4. 공의회의 소집과 전개
879년,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회의에는 동방 주교들뿐 아니라 교황 요한 8세의 대표단도 공식 참여하여, 회의의 정통성과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뚜렷했습니다.
회의에서는 포티우스의 복권뿐 아니라, 이전 공의회의 정통성 자체를 재검토하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교회 내 권위 구조와 교황의 역할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있었으며, 이는 이후 동서 교회 갈등의 신학적 핵심이 되기도 합니다.
5. 공의회 결정과 선언
- 869년 공의회의 결정은 정치적 강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무효 선언
- 포티우스는 정당하고 유효한 절차에 의해 총대주교로 복권됨
- 교황 요한 8세의 사절단은 이 결정에 동의하며, 공식 서명에 참여함
- 동서 교회의 일치는 교황과 총대주교 간의 협력과 상호 존중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 천명
이 회의에서는 교황의 보편적 권위를 전면 부정하지 않되, 로마 교황이 모든 지역 교회 위에 서는 위계적 구조는 동방 전통에 맞지 않음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6. 동방의 신학적 입장
동방 교회는 포티우스의 복권을 통해 ‘총대주교직의 정통성은 로마의 승인 이전에, 교회의 공동체적 합의와 전통에 기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회의는 성직 임명, 신학 해석, 교회 행정 등 여러 영역에서 로마 중심적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동방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7. 교회사에 미친 영향
이 공의회는 동방 정교회 전통에서 ‘제8차 세계 공의회’로 받아들여지며, 지금까지도 정통의 기준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반면,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회의가 이전 공의회를 무효화하고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제8차 공의회를 전혀 다른 사건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8세는 초기에는 포티우스 복권에 동의했으나, 이후 정치적 압력 속에서 서방 내 강경파의 비판을 받게 되며 입장을 철회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이미 교부 전통에 근거한 결정으로 동방 교회 안에서 뿌리내렸고, 이후 1054년 동서 교회 분열의 교리적·제도적 근거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오늘날 정교회는 879년 회의의 결정을 바탕으로 총대주교 체계를 유지하며, 교회 내 수평적 협력 구조를 이상적인 교회 질서로 간주합니다. 반면 서방은 교황 중심의 일원적 교회 구조를 이어오며, 두 체계는 이후 역사 내내 병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