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칼케돈의 해석과 삼장파 논쟁

작성자: aetov.com | 원문 일부 출처: blog.naver.com/0216young

1. 배경: 칼케돈 이후의 긴장과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를 공식화했지만, 동방 교회 내에서는 여전히 단성론 지지자들의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신학뿐 아니라 정치적 안정까지 위협받게 되었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교회의 통합을 시도하며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회의는 현재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으며, 신학적 명확성보다는 정치적 통합을 염두에 둔 회의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2. 삼장파 논쟁(Three Chapters Controversy)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소위 ‘삼장파 논쟁’이었습니다. 이는 다음 세 명의 신학자들의 저작을 정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 1) 테오도르 모프수에스티아: 안티오키아 학파의 중심 인물로, 네스토리우스 신학에 영향을 준 인물
  • 2) 테오도레트: 칼케돈 공의회 당시까지 존경받던 교부이나, 일부 저술이 논란이 되었음
  • 3) 이바스: 네스토리우스에 우호적 서신을 남긴 시리아 지역의 주교

이들의 저작을 정죄함으로써 황제는 단성론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었습니다.

3. 주요 인물들

  •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제국 내 종교 통합을 원했고, 공의회를 직접 소집하여 깊이 개입함
  • 교황 비질리우스: 처음엔 공의회 참석을 거부했으나, 후에 로마의 고립을 막기 위해 수용함
  • 동방 주교단: 황제의 입장을 지지하며 삼장파 정죄를 승인함

4. 공의회의 전개

회의 초반에는 교황 비질리우스가 소환을 거부하고, 로마 측 신학자들이 논쟁에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강력한 정치적 압박과 동방 교회 측의 결집으로 인해, 비질리우스는 결국 참여를 수락하게 됩니다.

회의는 삼장파의 저작을 이단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칼케돈 교리를 방어한다는 성명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서방 교회와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이후 몇 년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관계는 극도로 냉각되었습니다.

5. 공의회 결정과 신조 해석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새로운 신조를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존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칼케돈** 신조를 재확인하면서, 그 해석과 적용 범위를 규정했습니다.

회의는 다음을 주요 결정사항으로 삼았습니다:

  • 삼장파 신학자들의 저작은 네스토리우스적 이단과 연결되므로, 명시적으로 정죄한다.
  •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는 유지되며, ‘혼합되지 않고 나뉘지 않는’ 두 본성 교리는 변함없이 존중된다.
  • 오리게네스의 사상 중 일부 영지주의적 요소도 정죄의 대상이 된다.

6. 주요 신학적 이슈와 교회사에 끼친 영향

이 공의회는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주의 양극단을 막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신뢰를 훼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황 비질리우스의 굴복은 로마 교회의 독립성과 권위를 약화시키는 사건으로 해석되었으며, 서방의 여러 주교들은 공의회의 정통성을 일시적으로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후 교부 시대 신학 정리의 한 고비로 평가되며, 칼케돈 신조를 보완하고 지키려는 해석적 시도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