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신조: 삼위일체 교리의 균형이 완성되다

작성자: aetov.com | 원문 일부 출처: blog.naver.com/0216young

1. 시대적 배경: 니케아 이후의 혼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 이단을 정죄하고 ‘동질(homoousios)’이라는 개념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천명했지만, 그 후 수십 년간 교회는 여전히 분열 속에 있었습니다. 황제들이 바뀔 때마다 공의회의 결정이 뒤집히고, 성령의 위격과 본질에 대한 교리는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381년,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며 **제2차 세계 공의회**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했고, 이 공의회에서 기존의 니케아 신조를 확장하고 보완한 새로운 신조가 채택됩니다.

2. 공의회의 주요 인물들

이 공의회의 중심에는 동방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젠(Gregory of Nazianzus): ‘신학자 그레고리’로 불리며 성령의 신적 위격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 바실리우스 대제(Basil the Great): 삼위일체 교리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동방교회의 거장입니다.
  •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니케아 신앙을 강력히 지지하며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3. 콘스탄티노플 신조 원문 (381년)

이 신조는 오늘날 우리가 예배 중 사용하는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주요 고백 부분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 보이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주를 믿는다.

우리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에게서 나신 이, 세세 전부터 나신 이,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 창조되지 않고 나신 분으로,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는다.

그는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체를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되시고, 사흘 만에 성경대로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셔서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는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이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명을 고대한다. 아멘.

4. 니케아 신조와의 차이점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기본적으로 **325년 니케아 신조의 연장선**에 있으나, 몇 가지 결정적인 보완이 이루어졌습니다:

  •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 추가: 니케아 신조에는 없었던 성령의 위격과 본질에 대한 명확한 고백이 포함되었습니다.
  • 교회와 세례, 부활, 영생에 대한 내용 추가: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과 종말론적 희망을 신조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 언어적 표현 정비: ‘하나님의 아들’이 ‘동일 본질’이라는 표현을 명확하게 반복해 교리적 혼란을 줄였습니다.

5. 가장 중요한 신학적 쟁점

이 신조의 핵심 쟁점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인 성령**에 대한 신학적 정의였습니다. 당시 많은 교회들은 성령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고백할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고, 일부는 성령을 하나의 ‘영적 힘’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성령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게 예배받고 영광 받으셔야 할 ‘위격 있는 하나님’이라는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는 완성된 형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6. 당시 교회에 끼친 영향

이 신조는 이후 수백 년에 걸쳐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개신교 대부분의 교단에서 공통적으로 수용되는 표준 고백이 됩니다. 공예배에서 고백되는 신조의 기본 형식이 되었으며, 후대 칼케돈 공의회(451년)나 아타나시우스 신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국가 권력(테오도시우스 황제)과 교회가 신학적 일치를 추구하는 첫 사례가 되었고, 이후 기독교가 제국 중심 종교로 자리를 잡는 흐름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